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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혁신 신약'의 씨앗이 꽃 피울 그 날이 오려면

씨앗이 있어도 적절한 온도와 수분, 산소를 머금은 토양이 없으면 발아하지 못한다. 한국 바이오 산업도 마찬가지다. 혁신 신약이라는 씨앗이 충분히 준비돼 있어도, 자본과 시장 환경이라는 토양이 갖춰지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다.
이번 <끝까지HIT 15호> 커버스토리를 취재하며 벤처캐피탈, 바이오텍, 정부 산하 기관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바이오 산업에 흩뿌려진 혁신 신약의 씨앗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과 한계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현실이 너무 달라 보였다. 투자자들은 투자금 회수에만 집중했고, 바이오텍 사람들은 혁신 신약이 될 기술임에도 시장이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며 토로했다. 정부 지원기관 관계자들은 한정된 예산 안에서 현실적 제약을 설명했다.
서로의 말이 평행선을 달리는 듯했지만, 취재를 이어갈수록 그 끝에는 모두가 같은 목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한국산 혁신 신약의 성공'이다. 서로의 입장은 달랐지만, 그 목소리의 바탕에는 한국 바이오 산업을 향한 진심이 있었다.
바이오 산업의 성공 방정식은 국가마다 다르다. 미국과 유럽은 기술이전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생태계를 키웠고, 한국은 상장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 단순한 차이가 산업의 구조를 크게 갈라놓았다. M&A 중심 시장에서는 기술이 활발히 팔리며 그를 발판삼아 다음 연구로 이어지는 순환이 만들어졌지만, IPO 중심 시장에서는 기술이 증시 안에서만 소비되고 사라지는 구조가 굳어졌다.
지난 9월 한 달 동안 글로벌 시장에서는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 규모의 인수합병(M&A)이 4건 이상 발생했고, 이후 이어진 거래까지 합해 총 거래 규모는 26조원을 넘어섰다. 젠맙은 네덜란드의 메루스를 80억달러에 인수했고, 화이자는 비만치료 신약 개발사 멧세라를 사들이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머크(MSD), 노바티스, 길리어드 등 글로벌 제약사들도 항체·RNA·소분자 신약 바이오텍을 활발히 사들였다.
임상 1상에서 가능성을 입증한 후보물질이 빅파마로 넘어가면서, 신약 개발은 빠르게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작은 회사가 끝까지 임상을 끌고 갈 필요가 없고, 성공한 연구자는 그 자본으로 다시 창업한다. 생태계가 스스로 순환하는 구조다.
한국의 현실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벤처회사의 자금 회수 방법이 상장(IPO)에 과도하게 집중됐으며, 미국처럼 M&A이 주요 회수 수단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기업의 인수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고, 제도적 장벽도 높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은 짧은 펀드 만기(7~8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기에 결국 IPO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는 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 상장이 막히면 자금이 돌지 않고, 회수가 막히면 시장 전체가 얼어붙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기술이 거래되는 시장이 성숙하지 못한 탓에, 자본시장이 기술가치 실현의 통로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IPO가 오히려 M&A를 막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서 IPO를 하면 기업 가치가 너무 올라 빅파마가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전임상 플랫폼 기업이 5000억~1조원 규모에 인수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한국에서는 유사한 단계의 기업이 상장만으로 2조원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국 상장으로 인해 가진 기술에 비해 높아진 기업가치는 M&A로 이어지지 못한다.
국내 제약사들이 인수를 꺼리는 이유도 단순히 자본력 부족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인수 후 신약 개발을 매니지먼트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이 구조적 병목으로 꼽힌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수 후 임상과 연구를 통합할 조직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제약사의 의사결정 구조가 대부분 매출 중심이고, 장기적 R&D를 끌어갈 여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벤처를 인수하더라도 인수 후 임상 인력과 연구 프로세스를 통합해 끌어갈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결국 국내에서는 M&A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벤처는 IPO를 택하고, 제약사는 도입신약과 개량신약, 제네릭에 집중한다. 이는 단순히 자본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R&D와 자본이 분리된 산업 구조의 귀결이다.
이 구조의 부담은 연구자와 투자자 모두에게 돌아간다. 연구자는 임상 데이터를 쌓을 기회를 잃고, 투자자는 상장 이후 리스크를 떠안는다. 산업은 순환하지 않고, 성과가 축적되지 않는다.
이러한 혹한기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흩뿌려진 혁신의 씨앗들이 조금씩 움트고 있다. 리가켐바이오, ABL바이오, 알테오젠 같은 소위 '빅' 바이오텍들은 기술수출로 생존의 길을 찾고 있다. 이들은 글로벌 제약사와의 대형 계약을 통해 자본을 유입시키고, 그 자본으로 후속 파이프라인을 키워가며 자체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내 기술수출은 올해 상반기에만 12조원을 넘어섰고, 이미 작년 한해 기술수출 실적을 뛰어넘었다.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기술 수출은 '개별 기업의 성공'이지, '시장 전체의 순환'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결국 한국 바이오 산업이 혁신 신약을 싹틔우기 위해서는 상장을 넘어 기술이 거래되고, 기업간인수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 방향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지만, 언젠가 흩뿌려진 '혁신 신약'의 씨앗들이 함께 꽃을 피울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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