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HIT |
성과보다 방어 앞세워... 회사 비전 보여줄 무기로 써야

#. 2012년 10월,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은 미국 이동통신사 3위 스프린트 인수를 선언했고, 미국 여론은 싸늘했다. 과거 버블 붕괴 이전 일본 자본이 미국 금융과 부동산에 진출하던 때가 오버랩되며, 통신마저 침략하려 한다는 경계였다.
안보 논리는 미국 안의 반대를 부추겼다. 경쟁사 디시네트워크는 더 높은 인수가를 제시했다. 야구로 따지면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상황이었다. 공 하나면 회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처지였다.
다급한 상황에서 손 마사요시는 84페이지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미국 당국을 찾아갔다. 그는 수치를 구체적으로 보이는 대신 한국과 일본, 미국의 LTE 속도 비교 데이터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세계 최강국이라 자부하는 미국의 통신 속도가 거북이 수준이라며 미 정부를 긁었다.
그가 내민 한 문장이 관료들의 시선을 잡았다.
"우리가 스프린트를 인수해 시장에 진짜 속도 경쟁을 부르겠다."
손 회장은 하나의 문장을 더 던졌다.
"우리의 경쟁에 중국산 장비는 없다."
기존 장비까지 싹 걷어내겠다는 말에 미국의 반대 논리는 퇴로마저 잃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는 소프트뱅크의 스프린트 인수를 허가했다. 84장의 슬라이드는 사업계획서가 아니라 역전의 홈런 배트였다.

<히트뉴스>는 올해 3분기 기업설명회 자료를 들여다 보고 있다. 수치 분석을 넘어 "회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아보고, 그들이 말하지 않은 한마디를 찾아내 향후 방향성을 엿보기 위해서다.
여러 회사를 분석해 보니 대개 회사가 IR이라는 단판 승부에서 투자자에게 '투자할 가치'를 주고 있는지 물음표가 남았다.
모 회사 사례를 보자. 매출과 영업이익 숫자는 솔직하게 보여준다. 수익성 감소와 관련해 이런저런 이유를 댔다. 그 뒤로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을 세부적으로 나열했다. 교과서적이다. 사실만 담겼다. 우리나라 제약바이오 기업 중 상당수 IR 프리젠테이션은 비슷하다. 담백하지만 투자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주식을 더 사라고? 더 들고 있으라고? 그래서 회사가 뭘 하고 싶다는 거지?"
국내 제약사 IR자료는 투자자가 듣고 싶은 말, '내가 돈을 벌 수 있느냐'에 속시원하게 답하지 않는다.

같은 기간 나온 소프트뱅크의 자료를 다시 담아봤다. 물론 회사 규모와 최고경영진이 직접 나오는 대규모 행사라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세부 경영실적은 별도의 종이로 대신할 뿐 프리젠테이션은 단순하다.
첫 장은 '과거 최고 매출', '전 부문 증익'이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박아넣는다. 엄청난 데이터 설비 비용을 '우리는 이제 통신사가 아니라 AI 인프라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압도적으로 성장하겠다는 스토리 안에 전년 대비 증가한 비용 투자와 조금 낮아진 영업이익률을 지워버린다.
물론 소프트뱅크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IR과 프리젠테이션에 진심이라는 점, 기업과 설명회의 규모가 다르다는 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들이 많다는 점 등 IR 담당자들의 고충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명회 자료를 만드는 셀트리온 역시 '회장님의 뛰어난 입심'과 다르게 다소 얌전할 정도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난해와 같은 디자인에 수치만 바꾸고 일부 페이지만 추가해 올해도 순항 중이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회사들의 IR이 과연 매력적으로 보일지 미지수다. 여차하다간 지금도 회자되는 기사 제목인 '졸렬한 타율관리'가 될 수 있어서다.
새 약도 있고 임상 결과도 제시하지만 그것이 앞서 나온 '내 돈을 벌어줄 수 있느냐'는 이슈와는 완전히 등치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약업계의 방어전은 끝났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투자자의 돈을 바이오 대신 제약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시대다. 매출 규모에도 시총 차이가 수십 배씩 벌어지는 회사가 보인다. 쳐내지 못할 공은 충분히 골랐다. 제약업계의 IR은 이제, 과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러야 할 때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