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HIT | 오픈 이노베이션 앞에서 망설이는 국내 제약사들
내부 비판과 업계간 인식 차이 등 '윗분들'도 고민 지적도
이미 해외로 떠나는 벤처들, '시작이 반'은 틀리지 않았다

중국 고전 '신어'에 나오는 '엽공호룡'(葉公好龍) 이야기를 떠올렸다. 초나라에 엽씨 성을 가진 이가 살았다. 그는 용을 사랑해 집 안팎을 조각과 그림으로 도배하듯 꾸몄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용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느 날 이같은 소문이 진짜 용에게도 들어갔다.
용은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집 창문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놀라 황급히 도망쳤다. 용의 모습만 사랑했을 뿐, 날카로운 발톱과 거대한 크기를 견디기에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국내 제약업계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문득 엽공의 이야기가 겹쳐 보인다. 물론 오픈이노베이션을 외치며 MOU를 체결하고 협약식을 연다. 여러 지방에서 바이오벤처 대표들이 모여 기술을 뽐낸다. 너나할 것 없이 회의와 행사에 참여한다. 하지만 전통있는 국내 제약사들 중 정작 국내 바이오 벤처와 진짜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용의 그림은 사랑하지만, 진짜 용은 두려운 것 아닌가.
'회사가 오픈 이노베이션에 소홀한 듯하다'라고 한 제약사 관계자에 질문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오픈 이노베이션도 할 수 있는 (역량과 태도가 되는) 제약사나 할 수 있다. 실무선에서 좋은 제안을 해도 경영진 쪽에서 당장의 수익이나 지금의 경영위기를 탈피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의견 속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나온다. 첫째는 실패를 감당할 수 없는 내부 비판이다. 가능성을 보고 국내 바이오벤처에 투자했지만 공동개발이 좌초되면 '왜 검증 안 된 곳과 했느냐'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고 내부 연구 역량을 키우면 다른 차원의 불만이 나온다. 현장을 뛰는 직원들은 홀대하면서 연구개발에만 과도하게 힘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엔 해명의 난이도가 얼마나 낮은지가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셈이다. 오너부터 실무진까지 모두가 겪는 고민이라는 지적이다.
둘째는 문화 충돌 과정에서 불안이다. 대형 제약사의 단계별 의사결정 구조는 벤처의 빠른 방향 전환과 항상 충돌한다. 여기에 업무협약을 맺은 이후 방향성을 정하면서 일어나는 부딪힘은 덤이다. 라이선스 인을 했다면 해당 회사에 맡기고 각 단계 이후에는 손을 놓는 해외의 사례와 다른 경우도 생긴다. 결과가 좋고 운까지 터지면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지식재산권 문제를 여러 문제가 실무진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셋째는 성과 불확실성이다. 국내 벤처는 임상 초기 단계가 많고 글로벌 진출 트랙레코드가 부족하다는 것은 업계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다. 투자 대비 회수까지 최소 7~10년을 각오해야 하는데 3~5년 단위 성과 평가 체계에서 내부 직원이 함부로 책임을 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도전을 허용할 수 있는 체계와 기업문화를 갖춘 곳은 많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국내 바이오벤처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벤처캐피탈의 관심이 바이오로부터 멀어진 시점인 만큼 투자 혹은 라이선스 인의 기회를 받기 위해 회사들은 바다 밖으로 눈을 돌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트뉴스>에서도 다뤘던 일본 쇼난 헬스이노베이션파크의 피칭이벤트다. 최근 열린 '이노베이션 타이거'라는 피칭 이벤트에는 아시아 16개 팀이 본선에 올랐다. 이 중 7개 기업은 한국 기업으로 일본과 동수였다.
더 놀라운 점은 예선 참여 기업이었다. 90개에 육박하는 기업 중 한국 기업은 50개가 조금 넘었다. 상대적으로 벤처 생태계가 약한 일본이라는 점, 국내 유관기관의 추천을 일부 받았다는 점을 제외해도 한국에서 큰 홍보가 되지 않았던 이벤트에 일본의 30여개 보다도 많은 행사에 참가한 것이다.
실제 이 이벤트 우승 기업은 한국의 메디맵바이오였는데 이들은 11월 미국 보스턴에서 자사의 기술을 알릴 기회를 얻었다.
바이오는 너도나도 속도의 차이가 신뢰의 차이로 이어지고 파트너십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만약 일본에서 피칭을 한 기업이 다른 나라의 기업과 딜을 하는 것은 단순한 라이선스 딜 주체 문제가 아니다. 국내 바이오 생태계의 성장 경로 자체가 해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기술은 국내에서 개발하되 임상과 상업화는 해외 파트너와 한다. 국내 제약사는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과거 '갈라파고스'라고 부르며 주변국을 조금은 우습게 봤던 우리가 외려 제네릭 위주의 '칼라파고스' 현상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국내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에서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선언적 의미를 넘어 표준이 될만한 계약조건과 IP 등의 부가적 조건을 맞추는 일도 필요하고 개발의 주체와 그 조연의 역할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도 고민할 지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성될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제약-바이오의 완벽은 협력의 결과물이지 전제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는' 문화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금액을 적게 해도 좋으니 그동안 신약개발과 거리가 멀었던 소위 전통 제약사들이 바이오벤처 여러 곳을 로테이션하며 협력전용 예산을 배정하고 협약 후 특정 기한 내 첫 마일스톤 검토를 의무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측정 가능한 기준'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구체적인 파일럿을 통해 해당 제약사에게 맞는 그리고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꾸준히 레퍼런스화하는 노력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실패해도 본전'이라는 도전과 모험을 제네릭 특허분쟁에 쏟으면서 정작 새 파이프라인을 찾는데 아까워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견디고 조율하는 조직 문화와 리더십만이 답이라는 점이다. '위고비'와 '엔허투'는 시장을 바꾼 약이며, 동시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한부 프로젝트라는 점이다. 당뇨 치료제이면서 '비만'치료를 위해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웃음을 들으며 '1년의 기한'을 부여 받았던 노보 노디스크의 연구진, ADC의 첫 대상으로 무려 1980년대 독성으로 결국 시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한 항암제를 개발하면서 3년의 시간을 얻어낸 다이이찌산쿄의 연구진을 믿어준 건 결국 경영진이었다.
엽공의 이야기로 다시 넘어가보자. 이 이야기를 건넨 이는 자장(전손사)이라는 공자의 제자다.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자장은 춘추전국시대 국력 확보를 외치던 노나라의 왕에게 찾아가지만 일주일간 만남을 거부당한채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가 만나주지 않는 노나라 임금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엽공호룡'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노나라 왕이 선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먼길을 왔으나 왕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는 왕이 선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외양은 선비이되 결코 선비가 아닌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뿐"이라고.
돌이켜보면 노나라 임금과 엽공이 용 앞에서 도망친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진짜'를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역사를 갖춘, 아직 오픈 이노베이션을 하지 않는 제약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실패해도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니 괜찮다'는 말을 외칠 수 있는 자세다.
협회 창립 80년, 업으로는 120년을 맞는 우리 제약업계가 새로이 찾아내야 할 먹거리는 분명하다. 진짜 용은 매서운 발톱과 한 눈에 담기 어려운 덩치를 가졌을 테다. 그럼에도 그 수염이 보인다면 지금은 눈으로 직접 봐야 할 때다. 가장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부터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