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약가 적용, 청구소프트웨어 활용 시 행정부담 축소
사회적 불신 완화 위해 결과 공개 등도 검토해봐야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최혜국(MFN) 약가 이슈로 글로벌 제약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의 약가가 국제적으로 참조되며 주요국 가격 책정에 영향을 미쳐왔고, 그 여파로 신약 도입 지연과 공급 불안정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위험분담제 확대와 이중약가 도입을 해법으로 제시하지만, 제도 정착을 위해선 넘어야 할 과제도 많다. 한국은 지금 글로벌 압력과 환자 접근성 사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① 너무 투명한 한국약가 딜레마
② 위험분담계약제 등 확대시행을 위해 넘어야 할 벽
[끝까지 HIT 15호] 현재 우리나라는 '의약품 선별등재 제도(positive list system)'를 통해 치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우수한 의약품을 선별해 건강보험에 등재하고 있다. 임상적 유용성이 우월한 의약품일 경우 ‘경제성 평가’를 통해 급여에 진입할 수 있다. 임상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비교 약제와 비용 효과성을 분석하고, 진료 현장에 맞는 근거를 생산한 이후 사회나 정부가 수용 가능한 지불가치를 찾고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항암제 또는 희귀질환 치료제 등은 대상 환자가 소수이거나 단일군 임상 자료로 허가를 받아 비용효과성 입증을 위한 근거 생산이 어렵고, 이는 곧 진입장벽으로 작용해 환자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에 ‘위험분담계약제도(RSA)’가 도입됐다. 신약의 효과나 보험재정 영향 등에 대한 불확실성을 정부와 제약사가 함께 분담하는 것인데, 대체 치료법이 없거나 비교 대상이 없는 고가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 등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제고하는 한편 비용효과적인 의약품을 선별급여한다는 급여 원칙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로 평가된다.
이처럼 신약의 환자 접근성 제고를 위해 도입된 위험분담제가 요즘 다시 화두다. 제약사와 건보공단 간 계약을 통해 표시가격은 높게 유지하되 일정비율을 공단에 환급하는 위험분담제 계약 방식은 국제 통상 압박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약가인하 일색 '기등재약' 에도 이중약가 적용 필요하다
지난 2013년 도입된 위험분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적용 범위가 확대됐다. 2020년 ‘후발의약품’과 ‘3상 조건부로 식약처 허가를 받은 약제’ 등에도 문을 열어줬고, 작년에는 비가역적으로 삶의 질이 저하되는 만성 중증질환까지 적용대상에 포함시켰다. 예를 들면 간질성 폐질환, 전신농포 건선, 유전성 혈관부종, 중증 천식 등이다.
위험분담제를 통해 급여권에 진입하는 신약들은 환급형 계약을 맺기 때문에 표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다르다. 한국의 약가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환자 접근성과 공급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분담제의 문을 더 넓힌다면, 신약의 급여 진입 문제는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등재 의약품은 안전한 걸까? 이미 급여가 적용되고 있는 기등재 약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실거래가 상환제도, 사용량-약가연동 협상, 사용범위 확대에 따른 사전 약가 인하 등 다양한 사후관리 기전으로 약가는 지속적으로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낮은 표시가격 노출이 이어질 경우 환자 접근성 위협과 특정 약제의 시장 철수나 유통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A 글로벌 제약사 MA 담당자는 "외국에서 급여등재 이슈가 발생하면서 국내에 이미 출시돼 처방되고 있는, 심지어 매출이 큰 약제의 철수를 검토한 적이 있다. 중국이었는데, 환자 수가 비교가 안되게 많았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작은 영향이라도 미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고 전했다.
업계는 기등재 의약품에 대해서도 위험분담제의 환급형 계약을 적용하고 또한 RSA 지위 약제의 경우 특허만료 이후에도 해당 계약을 연장하는 등 이중약가를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B 글로벌 제약사 관계자는 "현행 제도상 위험분담계약은 제네릭이나 바이오시밀러가 진입하면 자동 종료된다. 이 과정에서 대폭 낮아진 약가가 표시가로 노출되고 곧 공급 중단이나 시장 철수라는 리스크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등 주요국은 특허 만료 이후에도 의무적인 약가 인하 규정을 두지 않고 시장 자율 경쟁에 맡기고 있어 국내와의 약가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위험분담제는 2013년 도입 이후 10년 넘게 운영돼 왔으며, 다수 약제가 향후 특허 만료로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다. 국내는 물질특허 중심으로 특허 보호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만료가 해외보다 빨리 도래하는 경향이 있다. 기등재 약제의 공급 중단 위험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 업계 입장이다.
C사 관계자는 "환급형 계약이 제약사의 매출 구조를 저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환자에게 안정적인 치료제를 공급하고 정부 입장에서는 조세 기여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사도 이중약가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사 약가 담당자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국내 기업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국내 시장에만 머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중약가는 전략적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환자에게는 치료 접근성을, 정부에는 재정 효율성을, 제약사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제도다. 제약바이오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과감하고 전향적인 정책적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결국 이중약가는 환자 접근성을 확보하고 국내 의약품 공급 안정화 및 글로벌 경쟁력 강화 장치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과도한 투명성 때문에 불리하다면 개선해야
지난 9월 15일 국회의원 김윤·서영석 공동 주최로 열린 '의약품 통상압박 대응과 치료접근성 확보를 위한 위험분담계약제 발전방향 국회토론회'는 위험분담제 및 이중약가제 등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김연숙 과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효과적인 약을 비용효과적으로 적기에 공급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며 "위험분담제는 환자의 신약 접근성에 크게 기여했고, 환경 변화와 환자 수요에 맞춰 제도를 한 단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한국의 약가가 다른 나라보다 낮다는 업계 입장에 대해서는 "환급금액을 제외한 약가를 분석한 것 중에는 한국의 가격이 낮지 않다는 자료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단일 공적 건강보험 체계와 정률제 본인부담 구조로 인해 다른 나라보다 투명성이 높지만 이 때문에 불리한 측면도 있다. 과도한 투명성으로 발생하는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이중약가 체계나 별도 계약 방식에 대해서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건보공단 약제관리실 김형민 부장은 "국제 의약품 정책 변화가 국내 의약품 수입·수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MFN이나 고율 관세 정책 때문에 위험분담제 확대가 국내외 의약품 접근성과 수출에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견을 이해한다. 정부도 글로벌 정책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평원 청구소프트웨어 활용?
행정 부담 제거하고 국민 이해와 설득 병행 필요
국내 위험분담제 특징은 보험자인 건보공단이 환급받은 금액을 비율대로 환자에게 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안정훈 교수는 "다른 선진국들 중 위험분담제 환급액을 환자에게 비율대로 공유하는 나라는 없다"며 "초창기 위험분담제도 도입 논의 시 학계와 보험자 등에서 환자에게 실거래가보다 높은 약가를 적용해 본인부담액을 과다 징수할 우려를 들어 반대했기 때문에 생겨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위험분담제 확대와 기등재약 환급형 계약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행정적 부담이다.
건보공단은 올해 3월 환급형 계약 제도 시행으로 본인부담금 차액 지급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건보공단의 검토안은 청구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업무포털을 사용하는 방향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경우 복잡한 수기 확인 절차가 사라지면서 행정 부담이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도의 시행 또는 확대를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더욱이 건강보험 재정지속성, 행정부담, 사후관리 개선 등 과제는 남아있다. 재정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국민들의 이해와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충분한 설명과 설득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패널로 토론회에 참석한 히트뉴스 허현아 기자는 "RSA는 단순히 약가 관리 수단을 넘어, 치료제의 임상적·경제적 불확실성을 사회가 제도적으로 흡수함으로써 환자는 치료 기회를 얻고, 제약사는 시장에 진입하며, 국가는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불신을 완화하기 위해 환급 규모나 재정 절감 효과 등을 국민에게 정기적으로 공개할 필요가 있다"며 "국제 통상 원칙상 세부 공개가 어렵다면 국회나 정부를 대상으로 비공개 보고 절차를 마련해 성과를 검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은영 이사는 "위험분담제가 지난 10년간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만큼 원칙적으로 확대 필요성에 동의한다"면서도 고시가와 실제가 간의 차이로 인한 투명성 부족, 재계약 불발 시 환자 치료 연속성 저해, 사후 관리 데이터 부족, 행정적 부담과 예측 불가능성 등을 대표적인 우려 사항으로 꼽았다.
이 이사는 "과거 제도 확대 당시 복지부와 심평원은 가입자 단체와 워크숍을 통해 충분한 설명과 합의를 도출하려던 과정이 있었다. 이번에도 우려와 반대 의견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와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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