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크, 런던 대형 R&D 허브 전면 철수
릴리, 영국내 '게이트웨이 랩스' 설립 연기
아스트라제네카, 미국에 500억달러 투자

머크와 일라이 릴리, 아스트라제네카 등 글로벌 제약사들이 영국에서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철회하거나 보류하고 있다. 같은 시기 이들은 미국에서 대규모 설비와 연구개발에 자금을 확대하며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케임브리지 본사 인근에 새 연구개발(R&D)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2억 파운드(약 2억7100만 달러)를 투입하려 했으나 계획을 중단했다. 약 1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됐던 사업이었지만 결국 멈춰섰다. 이 회사는 올해 초에도 정부 지원 축소를 이유로 리버풀 백신 연구·제조시설(약 6억1000만 달러) 투자를 취소한 바 있다.

일라이 릴리도 같은 길을 걸었다. 영국 정부와 맺은 2억7900만 파운드(약 3억7800만 달러) 규모 투자 협약의 일환으로 유럽 최초의 '게이트웨이 랩스' 설립을 준비했지만 계획을 미뤘다. 릴리는 "영국 생명과학 환경이 더 명확해질 때까지 투자를 확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머크는 단순한 투자 축소가 아니라 대대적 철수를 선택했다. 런던 킹스크로스에 10억 파운드(약 13억 달러)를 들여 대형 R&D 센터와 영국 본사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연구개발 조직을 철수하기로 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영국 최초의 미국 외 R&D 허브'라며 대대적인 기공식으로 주목받던 사업은 이제 철수로 마무리됐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머크는 "영국 정부가 혁신 의약품과 백신의 가치를 저평가하고, 생명과학 산업에 실질적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팔아도 남는 게 없는 '영국'…무너지는 투자 매력

영국 제약산업협회(ABPI)는 최근 보고서에서 "2018년 이후 영국 생명과학 산업이 세계 평균에 크게 뒤처졌다"고 경고했다.

수치상으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영국 제약 R&D 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1.9%에 그쳤다. 세계 평균 6.6%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2017년 18억9300만 파운드에서 2023년 7억9500만 파운드로 58% 급감했다. 상업 임상시험 순위도 2017년 세계 4위에서 2023년 8위로 하락다.

제약사들이 가장 크게 부담을 느끼는 부분은 약가 정책이다. 영국 국민건강보험(NHS)은 제약사 매출의 20~25% 이상을 환수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실제로 2023년 환수율은 26%를 넘었다. 제약사가 100만 원어치를 팔면 25만 원 이상을 정부에 다시 내야 하는 구조다.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팔아도 남는 게 없다'는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가격 결정 과정의 예측 불가성도 투자 매력을 떨어뜨렸다.

구조적 원인으로는 정부의 투자 평가 체계인 '그린북'도 꼽힌다. CEPA와 ABPI에 따르면, 이 제도는 세금이 투입되는 모든 지원·투자 사업을 평가하는 공식 지침서다. 신약 개발 지원, 연구소 설립 보조금, 공장 투자 심사까지 이 기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그린북이 단기 성과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신규 고용, 세수 증가 같은 눈에 보이는 수치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만, 연구개발이 가져올 생산성 향상, 수출 확대, 감염병 대응력 같은 장기 효과는 반영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제약·바이오 같은 장기 투자가 필요한 산업은 지원을 받기 어렵고, 글로벌 제약사들이 영국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보지 않는 원인이 되고 있다.

 

빠져나간 자본이 향하는 곳, 미국

반대로 미국은 제약사 자본의 새로운 목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오는 2030년까지 미국에 5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연구개발부터 제조까지 전방위적으로 역량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머크도 향후 4년간 90억 달러를 투입한다. 델라웨어에는 항암제 '키트루다' 생산 전용 공장, 노스캐롤라이나에는 HPV 백신 '가다실' 원액 제조시설을  착공했다.

그 배경에는 미국 정부의 공격적인 인센티브가 있다. 미국은 연구개발 세액공제, 보조금, 공장 건설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내걸고 신·증설 투자를 유도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제기한 200% 의약품 수입 관세 위협은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내 생산 체계를 강화하도록 압박했다. 불확실한 관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전략이 가속화된 것이다.

이외 미국이 매력적인 근본적 이유는 거대한 시장 규모와 높은 수익성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으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약가와 민간 보험·메디케어를 포함한 폭넓은 보험 보장 덕에 제약사 입장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당장은 미국이 여러 유인책을 확보한 가운데, 글로벌 제약사의 발걸음이 계속 머무를지, 영국이 제도를 손질해 투자 매력을 회복할 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히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