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인프라, IP 보호, 인재 유치 삼박자 갖췄다 평가

전 세계 바이오 산업의 지형이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예산 축소, 미중 간 무역 긴장, 글로벌 투자 위축 등 복합적 요인으로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연구개발(R&D) 전략과 거점 운영 방식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싱가포르는 정치적 중립성과 제도적 투명성을 기반으로 연구 인프라와 인재 확보 역량을 갖춘 '글로벌 바이오 허브'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는 싱가포르 과학기술연구청(A*STAR), 경제개발청(EDB), JP모건, SG Growth Capital과 공동으로 지난 7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미국과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 불안정성에 대응해 아시아 내 대체지를 찾는 글로벌 제약사들에게 싱가포르가 규제 연계성, 지식재산권(IP) 보호 체계, 우수한 인재 기반을 고루 갖춘 최적의 대안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제약사 투자 이어져...매력은 '국가간 규제 연계성'
실제 글로벌 제약사의 투자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싱가포르에 15억달러를 투자해 항체약물접합체(ADC)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있으며, 우시바이오로직스 또한 14억달러 규모의 R&D 및 생산시설을 조성하고 있다. 존슨앤드존슨의 글로벌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JLABS는 현지에서 25개 바이오 스타트업을 육성했다. 모더나의 초기 투자사로 알려진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은 A*STAR와 함께 약 7800만달러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해 싱가포르에 별도 허브를 구축했다. 일본 주가이제약(Chugai Pharmaceuticals)의 자회사인 Chugai Pharmabody Research는 A*STAR,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와 공동으로 항뎅기열 항체를 개발한 바 있다.
보고서는 싱가포르의 유연한 규제 환경을 주요 경쟁력으로 꼽는다. 싱가포르 보건과학청(HSA)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 영국 의약품청(MHRA) 등과 협력 체계인 Project Orbis와 Access Consortium에 참여해 규제 병행 심사 및 글로벌 연계를 가능케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는 미국과 유럽 외에 대체 허가 거점으로 고려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실제로 일부 기업은 싱가포르에서 최초 허가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IP 보호 체계, 법률의 투명성, 정책의 일관성 등 제도적 안정성은 기업들이 기술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장기적으로 R&D 법인과 지사를 설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공 중심의 바이오 생태계…30년 전략의 결실
싱가포르는 약 30년 전부터 공공 중심의 바이오 생태계를 구축해왔다. 싱가포르는 연구 인프라, 인재 확보, 민간 부문 육성을 포괄하는 장기 전략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 바이오폴리스(Biopolis)를 중심으로 연구와 상업화를 연결하는 통합 생태계가 자리잡았다. 그 예로 MSD는 2009년 바이오폴리스 내 번역의학연구센터(TMRC)를 설립한 이후, 바이오마커 및 후보물질 발굴 등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특히 A*STAR를 비롯해 실험신약개발센터(EDDC), 진단기술개발허브(DxD Hub) 등 주요 공공기관은 기초과학과 응용연구, 상용화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바이오텍의 초기 연구와 사업화 단계를 지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안정적인 자금 지원을 위해 중장기 R&D 투자계획인 RIE(Research, Innovation and Enterprise) 시리즈를 운용하고 있다. 현재 시행 중인 RIE2025(2020~2025)는 총 280억 싱가포르달러 규모이며, 생명과학을 포함한 전 분야의 R&D에 걸쳐 자금을 배분하고 있다. 2026년부터 시행될 RIE2030에서는 인공지능(AI)과 생명과학의 융합을 핵심 테마로 설정해 신기술 개발에 주력할 계획이다.
자본·인재 전략까지…바이오 생태계의 허브로

벤처캐피털의 보수화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으로 초기 R&D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공공 투자와 정부 보조금, 국가 주도의 자본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단계 자금을 공급하며 민간 투자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EDB 산하 자회사 EDB 인베스트먼트는 SG Growth Capital 펀드를 통해 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 등 유망 바이오 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해 왔다.
인재 유치 전략도 싱가포르의 바이오 산업 경쟁력을 지지하는 핵심 축이다. Tech.Pass, ONE Pass, Tech@SG 등 다양한 비자 프로그램은 글로벌 창업가, 연구자, 첨단 기술 인력의 장기 체류를 지원하며, 바이오 기업들이 핵심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향후 RIE2030에서는 AI와 생명과학 융합형 인재 양성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으며, SGInovate의 헬릭스 몰입 프로그램 등은 연구자들이 상업화 중심의 벤처 생태계로 진입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재 정책은 싱가포르가 단순한 R&D 거점을 넘어 아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글로벌 창업 생태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보고서는 싱가포르가 단기간에 글로벌 바이오 허브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공공-민간 연계 구조, 규제 연계성, 기술·인재 보호 인프라, 자본 유치 전략이 상호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와 구조적 차별성이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의 정부와 연구 기관들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이 지역의 글로벌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며 규제 현대화, 인재 유치, 공공-민간 통합을 늘림으로써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생명공학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