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중의 영화로 명상하기] 그래비티

과학기술 발전의 그늘. 현대인은 불안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명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명상이 불안을 떨칠 탈출구인가. 불안의 일단을 명상으로 이긴 작가 오제중이 영화를 모티브로 <히트뉴스> 독자들에게 명상의 길을 안내한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오 작가는 명상을 문화, 예술, 영상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며 에세이스트 겸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

그래비티(Gravity, 2013, SF)

감독 : 알폰소 쿠아론
주연 : 산드라블록, 조지클루니

수상 : 8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국내개봉 : 2013.10.17 (관객 331만명)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친구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창유리에 비친 얼굴은 에스프레소만큼짙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긴 침묵 끝에 친구는 오래된 고민을 털어놓았다. 예전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십여 년이 넘도록 그 기억을 떨쳐내지 못해 힘들다고 했다. 친구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쉬었고,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씁쓸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를 한 모금 마시고 친구에게 영화 '그래비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비티' 영화 스틸컷 / 출처=네이버 영화
'그래비티' 영화 스틸컷 / 출처=네이버 영화

조지 클루니와 샌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그래비티'는 아득한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생존과 극복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는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던 중 러시아의 인공위성 파괴로 생긴 우주 파편에 휘말린다. 연쇄적인 충돌로 우주 왕복선은 산산조각 나고, 통신마저도 끊긴 채 동료들을 모두 잃은 스톤 박사는 광활한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다. 사실, 그녀의 고립과 표류는 이미 지상에서 시작됐다. 네 살배기 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현실의 고통을 피해 선택한 우주에서, 역설적으로 더 극한의 위기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동시에 완전히 단절된 이 모순적 공간에서, 그녀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스톤 박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선배 우주 비행사 맷 코왈스키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던 맷 코왈스키는 선승처럼 따끔한 죽비를 내리친다. "붙잡으니까 힘든 거야. 놓을 줄도 알아야 해." 그것은 틀에 박힌 충고가 아니다.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 어린 위로다. 그리고 불안과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명상적 가르침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곤 한다. 그럴 때 맷 코왈스키와 같은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하다. 때론 통찰이 담긴 말 한마디, 마음을 울리는 글 한 줄이 막막한 어둠의 미로에서 등대와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우주는 스톤 박사에게 완전히 다른 관점을 열어준다. 지구에서 600km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본다. 푸른 구슬처럼 보이는 지구를 바라보며, 자신을 짓누르던 고통도 결국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명상에서는 이러한 관찰과 알아차림을 오래전부터 중요한 수행법으로 삼아왔다. 우주인이 지구를 조망하듯, 명상은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에서 한걸음 물러나면, 불안은 차츰 옅어지고 고통도 점점 가벼워진다.

'그래비티' 영화 스틸컷 / 출처=네이버 영화
'그래비티' 영화 스틸컷 / 출처=네이버 영화

숨막히는 생존의 위기 속에서 스톤 박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우주 파편의 위협,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산소통, 귀환선까지 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그녀를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난관을 겪으면서 깊은 트라우마의 늪에서 마침내 벗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는 명상의 핵심 원리다. 현재를 온전히 마주하는 훈련으로, 지난날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지금의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 순간들을 하나둘 알아차리면 어둠의 족쇄는 풀리고 자유로운 발걸음이 시작된다. 마치 스톤 박사가 지구로 무사히 돌아와 처음 땅을 내딛듯이.

카페 안은 좁은 테이블 간격만큼 소란했다. 나는 목청을 높여 친구에게 손이 뜨겁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제야 친구는 그때의 기억처럼 커피잔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잔에서 손을 뗐다. 그 바람에 커피가 출렁이며 잔 밖으로 흘러넘쳤다. 나는 휴지로 얼룩을 닦으며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붙잡지 않으면 흔들리지도 않아." 친구는 몸을 한껏 뒤로 젖혀 테이블에서 600km쯤 물러났다. 그러고는 태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한 커피잔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저작권자 © 히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