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중의 영화로 명상하기] 서브스턴스
과학기술 발전의 그늘. 현대인은 불안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명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명상이 불안을 떨칠 탈출구인가. 불안의 일단을 명상으로 이긴 작가 오제중이 영화를 모티브로 <히트뉴스> 독자들에게 명상의 길을 안내한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오 작가는 명상을 문화, 예술, 영상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며 에세이스트 겸 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감독 : 코랄리 파르쟈
주연 :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데니스 퀘이드
국내개봉 : 2024.12.11 (관객 56만명)
얼마 전 미용실에 갔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잠깐 졸다 깨더니, 발밑에 수북하게 쌓인 머리카락을 보고 소스라치듯 놀랐다.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그녀의 얼굴은 마치 뭉크의 그림 '절규'를 떠올리게 했다. 미용사는 빙그레 웃으며 쓰레받기로 머리카락 뭉치를 쓸어 담았다. 중년 여성은 이전 손님의 것임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이 탓인지 요즘 들어 머리카락이 부쩍 빠진다며 걱정을 털어놓았다. 거울 속 그녀의 눈에는 찬란하게 빛났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나르키소스처럼, 그녀는 머리를 다 자를 때까지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영화 '서브스턴스'는 '진짜 나'에 대한 집착과 갈등을 극한의 공포로 보여준다. 한때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엘리자베스. 하지만 지금은 에어로빅 방송을 진행하는 한물간 배우일 뿐이다. 50번째 생일날, '어리지도 섹시하지도 않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해고되고, 설상가상 교통사고로 병원 에 실려 간다. 퇴원을 앞둔 그녀는 정체불명의 간호사를 통해 '서브스턴스'라는 비밀스러운 약물을 알게 된다. '완벽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유혹에 끌린 엘리자베스는 결국 약물을 주입한다. 그러자 세포가 분열하듯 매혹적인 20대 여성 수가 그녀의 몸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기이한 변신에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7일씩 번갈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수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면서, 엘리자베스는 급속히 노화하며 괴물로 변해간다.

수는 자신이 엘리자베스의 그림자로 살기엔 너무 젊고 아름답다며,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다고 선언한다. 그녀에게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존재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나'라고 믿는가? 그리고 그 자아는 누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가? 사회적 성공, 타인의 인정, 완벽한 외모 같은 외부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순간, 우리는 그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끝없는 결핍과 자기혐오 속으로 빠져든다. 타인의 눈으로 조각된 자아는 결국 그 시선의 칼끝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진짜 나'란 무엇일까? 자동차를 떠올려보자. 엔진, 타이어, 핸들, 브레이크 페달, 시트 등 수많은 부품이 결합해 하나의 자동차를 이룬다. 그렇다면 그중 어떤 것이 '진짜 자동차'일까? 우리가 자동차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부품들이 잠시 모여 이뤄진 뿐, 영원불변한 '자동차 그 자체'는 어디에도 없다.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이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정체성 역시 감정, 기억, 생각, 감각, 신체, 사회적 역할 등으로 이루어진 임시적 조합에 불과하다.
자동차 부품이 교체되거나 분해되듯, 우리의 정체성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중 하나를 '진짜 나'라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린다. 바로 여기서 고통이 시작된다. 명상이란 이 진실을 직면하고 집착을 놓아주는 연습이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도록 허락하는 것. 그 느슨한 받아들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작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불교 미술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서 구상도(九相圖)를 본 적이 있었다. 1848년 일본 에도 시대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죽음 이후 점차 썩어 해골로 변하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보여준다. 육체의 덧없음과 미색에 대한 집착의 허무함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명상하듯 그림을 감상했고 이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다. 그렇게 무릎이 뻐근한 줄도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미용사가 하얀 보자기를 내 목에 두르며 어떤 스타일로 자를지 물었다. 나는 구상도를 떠올렸다. 몇 년간 길렀던 머리카락이 뚝뚝 잘려 나갔다. 어느새 발밑에 눈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