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꿈 많던 3원짜리 견습생 72년간 사회적 자산 남겨

초당 김기운 백제약품 회장이 아흔 다섯이던 2015년 6월 '아시아 최장수 CEO'라는 말머리로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회사명 백제약품이 호남을 이르는 말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뜻이 아니야. 백명을 구한다는 뜻이야. 넓혀 이야기하면 천명을 구하고 만명을 구한다는 뜻이야. 의약품을 통해서 말이지. 삼국시대의 백제가 아니야"라고 나직하지만 분명하게 말했었다. 그리고 말했었다. "돈…. 악착스러워봤자 10원도 못가져가. 공수래공수거야"라고.
 

"운동화는 이 자식아, 부잣집 새끼들이나 신는거여, 부잣집 새끼들이나….(草堂自傳, 金基運 著)" 아침 끼니를 굶고, 점심끼니 마저 기약이 없었던 가난하고 엄혹했던 일제치하 어느 추석이 가까워졌을 무렵 어머니는 악에 받쳐 운동화를 사달라 조르는 아들 김기운을 회초리로 때리며 소리 질렀다.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돼 보통학교를 1년 더 다닌 끝에 7년 만에 무안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열 여섯 나이에 월급 3원짜리 견습사원으로 의약품 도매업을 겸했던 '이토상점'에 취직해 일하며 약방을 열겠다는 목표로 약종상 시험을 준비했던 소년 김기운.

나이 스물 즈음 약종상시험 1, 2차에 합격(50명이 지원해 3명 합격)했지만 어리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불합격 돼 낙담했지만, 폐결핵을 앓으면서까지 다시 공부해 합격, 1946년 8월6일 목포에서 백제약방 문을 열었다. 72년간 백제약품의 CEO였고, 작년 매출 1조1150억원으로 키워낸 입지전적 인물 초당(草堂) 김기운 백제약품 명예회장이 2018년 9월 27일 9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인의 생을 백제약품으로 한정짓기엔 그가 남긴 사회적 자산과 족적에 비춰 지나치게 협소하다. 조용한 성품의 그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제약유통사업에 매진하면서 우리나라 의약품 유통업계의 선각자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조림과 육림사업, 육영사업, 사회복지사업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큰 인물이다. 정부로부터 표창은 물론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는 영면했지만 그의 진실한 땀은 초당림의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 약국에 배달되는 의약품에 배어있다.

사진은 '꿈을 넘어 꿈을 이룬 개척자 김기운 평전' 중에서
사진은 '꿈을 넘어 꿈을 이룬 개척자 김기운 평전' 중에서

▶제약유통사업=1946년 봄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는 동화약품 삼성제약 낙천당제약 천일제약 유한양행 금강제약 정도였다. 감기약조차 생산되지 않던 시절 그는 제약원료와 일본인이 조금씩 남기고 간 약을 사모아 그해 8월 목포에서 백제약방 문을 열었다.
 
백제약방(나중 백제약품으로 명칭변경)이 성업하며 입고되는 의약품이 4000종에 이르자 상품관리대장을 만들었고, 1964년 거래처별 거래 현황을 기록한 '백제형 상품관리 카드'로 완성했다. 고인은 이를 "백제약방 성공의 열쇠였다"고 회고했다. 주판과 철필에 잉크를 찍어 쓰던 시절의 혁신이었다.

백제약방의 상업적 영토확장 과정에서 그는 늘 외로이 싸워야 했다. 광주지점을 낼 때도 지역 도매업계의 저항을 받았고, 1975년부터 계획했던 대구 부산 창원지점 때도 지역도매업계로부터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지역도매업체들은 약사회를 움직이고, 거래대금 지불 금지 등으로 제약회사를 압박하는 통에 백제약품은 당시 약업계에서 '미운오리새끼'였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한 백제약품은 1988년 국내 최초로 최첨단 KGSP(우수의약품공급기준) 시설인 서울 의약품유통센터를 준공했고, 1996년 8월6일 초당림에 자리잡은 백제연수원에서 5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2000년 의약분업에 적응하고, 외국 유통업체 쥴릭코리아 등과 경쟁하는 가운데 2003년 5월 유통업계 최초로 전국 규모의 유통망을 갖췄다. 제약업계에 동아제약이 있다면, 유통업계의 대표주자는 백제약품이었다.

백제약품 역사는 사실상 대한민국 의약품 유통선진화의 역사나 한가지다. 서울영업본부, 호남영업본부, 영남영업본부 등 3본부는 완벽하게 전국 유통망을 연결한다. 물류와 상류라는 측면에서 최고기업으로 꼽힌다. 빚을 내지 않는 경영,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경영으로 기업문화가 보수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그래서 72년 백제약품은 견실함을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다. 고인은 제약업에도 관심을 가져 1982년 4월16일 자본금 1억원으로 초당약품을 설립했다.

▶조림·육림사업=1968년 7월 전남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 일대 임야 621정보를 매입해 영림허가를 받으며 이 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림시작 40년 즈음 1000정보에 500만주까지 심었다. 상주직원이 15명정도며, 묘목식재와 나무 관리에 투입된 연인원은 무려 3만4000여명에 이른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푸른숲이 됐지만 조성 과정에서는 화재도 발생하고, 심은 나무들이 다 죽어 다 캐내고 다시 식재하는 실패를 거듭했다.

한국임학계로부터 개인이 조성한 최고의 인공조림단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 숲은 고인의 호인 초당을 따 초당림(草堂林)으로 명명됐다. 고인의 호는 그의 고향에서 비롯됐다.
 
▶육영사업=고인이 사랑했던 부인 최금운 여사가 일찍 세상을 떠나며 알뜰하게 모아 남긴 막대한 금액으로 학교부지를 매입하면서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 늘 함께했던 부인은 고향에 학교를 세우자는 고인의 뜻을 선뜻 찬성해준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핸드볼로 유명한 백제여상, 초당대학교로 이어졌다.

얼마나 자랐나? 초당림에서 나무를 끌어안아 보고 있는 고인의 생전 모습
얼마나 자랐나? 초당림에서 나무를 끌어안아 보고 있는 고인의 생전 모습

▶사회복지사업=고인은 "많은 돈 가지려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왔다. 재혼한 부인 양은숙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양은숙 복지재단'을 만들어 평소 부인의 뜻을 이어왔다. 2015년 대담 당시 고인은 "10억원 출연으로 시작해 50억원 가량으로 늘었어. 매년 3억씩 모아 올해도 대학생들 50명에게 장학금 1억원 주고, 연탄지원, 쌀 지원에 1억7400만원 가량 썼어"라고 말하며 환하게 미소지었었다. 그러면서 "회사 수익이 나아지면 더 출연해서 재단이 커질수록 혜택을 높여가고 싶다"고 말했다.

1921년 전남 무안군 몽단면 사창리 초당산마을 3칸짜리 토담집에서 태어난 고인은 72년을 일하며 많은 사회적 자산을 남기고 영면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3층 30호실이며, 28일부터 조문객을 받는다. 4일장을 치르고 오는 30일 오전 초당림이 위치한 전남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 선영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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