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
김기호 HK이노엔 상무
세계 최초의 제약사는 1668년에 설립된 독일의 머크사다. 우리나라에서는 1897년 동화약품이 최초로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약 300여년이 지난 2023년 현재 글로벌 의약품 시장은 1조6068억달러(약 2,150조원)로 성장했다[2024, 한국바이오협회]. 2023년 기준 글로벌 1위 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슨의 매출액은 852억 달러(약 114조원)다[2024, 피어스파마]. 우리나라 매출 1위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연간 매출액은 3조6964억원[2023, 전자공시시스템]으로 글로벌 1위 제약사의 약 3% 수준이다.
'1668년 vs 1897년' 그리고 '114조원 vs 4조원'
글로벌 제약사와 우리나라 제약사 규모가 이렇게 차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독일보다 200여년 늦게 시작했기 때문일까? 화이자(1849년), 일라이 릴리(1876년), 존슨앤드존슨(1887년), 애보트(1888년) 등 지금 글로벌 무대를 주름잡는 주요 제약사들의 설립 시기가 대부분 1800년대 후반인 것을 보면 비단 ‘늦은 출발’로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유럽과 달리 일제강점기 등 현대사의 많은 굴곡을 겪었기에 글로벌 수준과 산업 격차가 나타났겠으나, 그것만이 우리 제약산업의 모든 문제를 대변해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글로벌 시장과 격차가 생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120여년 제약산업 역사를 지나는 동안 글로벌 매출 1조원 이상의 블록버스터 신약이 나오지 않았다.

글로벌 의약품 시장 〉(자동차 + 반도체) 시장
글로벌 의약품 시장이 자동차와 반도체 시장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출이 중요한 우리 경제에서 글로벌 의약품 시장은 매우 중요하지만, 아쉽게도 2023년 우리나라 의약품 수출액은 9조8851억원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은 약 0.5%에 불과하다.
역대 정부도 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규모와 그 중요성을 알기에 2013년부터 제약·바이오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며, 2023년에는 2027년까지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 2개(2030년 3개), 글로벌 수준 제약기업 3개(2030년 5개)를 실현한다는 구체적 목표를 세워 매진하고 있다.
이런 목표는 과연 실현 가능할까? 우리 제약·바이오업계 생태계가 글로벌 시장 매출 1조원 이상을 달성하는 블록버스터 신약을 만들고 꾸준히 창출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는지 냉정한 시각으로 진단해 볼 때,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비단 정부만이 아니라 제약·바이오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이런 의문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약개발 전 과정 혁신 생태계로 '렉라자' 기적 이어야
며칠 전 우리 제약·바이오업계에 낭보가 있었다. 유한양행 '렉라자'가 국내 항암제 최초로 미국 FDA 허가를 획득한 것이다. 렉라자는 LG화학 '팩티브'에 이어 국내 9번째 FDA 허가 의약품이 됐다. 그 뒤를 이어 HK이노엔 '케이캡', HLB '리보세라닙’ 등이 FDA 허가를 추진하고 있다. 작금의 우리 제약·바이오업계 생태계를 생각했을 때 혹자들은 이런 성과들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신약개발 제약·바이오기업들은 10여 년 이상의 연구기간과 1조원 이상의 연구 비용을 들여 1만 분의 1 확률에 도전하고 있다. 글로벌 매출 1조원 이상을 기록하는 블록버스터 신약을 지속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야만 하며, 효율적인 신약 창출을 지원하는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자동차와 반도체산업을 글로벌 1등 산업으로 키운 정책적 지원 노하우과 역할이 이제는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을 향해야 할 때다.
정부는 제약·바이오 업계가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을 적극적으로 상용화할 수 있도록 신약 개발 전 과정에 걸쳐 지속적이고 단단한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업력이 그리 길지 않은 길리어드(1987년, 타미플루 등), 모더나(2010년, 코로나19 백신 등)의 신약 창출 사례를 통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기업은 개발 초기, 정부는 '임상3상' 투자하는 마중물 전략 필요
신약 개발 과정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지점은 임상시험이다. 특히 임상3상 비용이 가장 많이 소요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지난 1월에 발표한 ‘2022년도 신약개발 정부R&D 투자 포트폴리오 분석’ 자료를 보면 2022년 정부는 신약개발 R&D 예산으로 총 6219억원을 지원했는데 이 중 임상3상에는 R&D 총 예산의 3.3%인 206억원만 투입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합성신약이나 바이오신약의 임상3상에는 단 한 푼도 지원되지 않았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약 개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비용이 드는 임상시험 단계, 특히 임상 3상 비용에 대한 정부의 R&D 투자가 절실하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는 민간이, 임상3상 등 후기 단계는 정부가 집중 투자하는 투트랙 전략이 요구된다. 한정된 R&D예산 안에서 최고의 성과를 얻으려면, 글로벌 시장을 지향하는 신약 중 어느 정도 약효와 시장성을 입증한 약물을 선별해 지원하는 선택과 집중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공불융자제도'를 활용하면 임상 3상에 대한 정부 지원을 받아 글로벌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의 원리금과 특별부담금을 회수해 다른 유망 신약에 투자하도록 견인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 성공 열쇠는 '가격 경쟁력'
글로벌 신약을 개발에 성공한 후 시장 경쟁력을 담보하기 위한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신약의 글로벌 우위를 좌우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격 경쟁력'은 신약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지난, 8월 8일 개정된 '신약 등의 협상대상 약제의 세부 평가 기준'에는 그간 민관협의체에서 활발하게 논의됐던 '혁신신약'의 가치가 반영됐다. 제약·바이오업계는 '혁신신약' 가치 반영을 고민하고 실현해 준 정부의 노력을 반기는 분위기다. 다만, 협의체에서 함께 논의했던 국내 개발 신약의 가치 반영이 고시 및 공고 개정 등의 사유로 빠졌다는 점은 아쉽다.
국내 개발 신약 가치 평가에 역차별 요소인 '1.7 보건의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필요한 경우에 대한 평가기준'과 '1.8.1 위험평가 적용대상 여부'와 관련해 글로벌 진출 국내 개발 신약 등에 대한 이중가격제 등은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또한 건강보험 재정 중립을 기반으로 한 이중가격제는 글로벌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일제제 등재 시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글로벌 진출 국내 개발 신약의 보험 약가 평가 우대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환급제(사후적 이중 가격제)를 통해 표시 가격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 사례를 써가는 '케이캡'(HK이노엔 위식도역류질환 신약)이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글로벌 진출 신약 "이중가격제"
R&D기업 "약가 사후관리 획기적 감면" 검토를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 창출(상용화)이 소수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제2, 제3의 성과로 이어지려면 기업이 R&D 투자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신약개발 기업은 글로벌 또는 내수 시장을 불문하고 R&D 자금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자금 여력이 부족해 신약 상용화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제2차 건강보험종합계획(2024년~2028년)의 일환으로 약가 상한금액 조정 기전 통합 연구를 추진하고 있는데, 약가 사후관리 통합과 연계한 R&D 투자 확보 방안을 고려할만하다.
정부는 R&D 투자를 제대로 하는 기업에 사후관리로 인한 약가 인하율을 획기적으로 감면해 주고, 해당 기업은 감면액을 반드시 R&D에 재투자하도록 하는 환류 체계를 만든다면, 신약개발 기업의 R&D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R&D 투자를 전제로 약가 사후관리를 감면받은 기업이 감면 금액의 사용처를 정부에 보고하는 등 투자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며 R&D 투자가 미진한 경우, 제약·바이오 업계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고려해 환수하는 조치 등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0여년간 정부와 제약바이오업계는 글로벌 시장과 격차를 줄이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다양한 신약과 신기술 개발 그리고 연이은 기술 수출 성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제약·바이오업계는 아직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해 완제약 수출보다 기술 수출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우수한 신약개발 기술을 글로벌 시장에 수출하는 것은 의미있는 성과지만, R&D 자금 여력이 부족하거나 혁신 추진 동기를 약화하는 환경 등으로 훨씬 큰 부가가치를 실현할 완제약 개발(신약 상용화)에 이르지 못하는 사례들은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이제는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 창출(상용화) 도전을 위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정부의 목표대로 2030년 글로벌 매출 1조원 이상의 블록버스터 신약을 3개 이상 만들어 낸다면,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시작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을 창출(상용화)할 토양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다같이 꿈꿔 왔던 '제약 강국'과 '진정한 국민건강주권'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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