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시장 변수된 약가 참조국의 굴레
트럼프가 쏘아 올린 '최혜국 참조 가격' 약가제도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최혜국(MFN) 약가 이슈로 글로벌 제약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의 약가가 국제적으로 참조되며 주요국 가격 책정에 영향을 미쳐왔고, 그 여파로 신약 도입 지연과 공급 불안정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위험분담제 확대와 이중약가 도입을 해법으로 제시하지만, 제도 정착을 위해선 넘어야 할 과제도 많다. 한국은 지금 글로벌 압력과 환자 접근성 사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① 너무 투명한 한국약가 딜레마
② 위험분담계약제 등 확대시행을 위해 넘어야 할 벽
[끝까지히트15호] 미국의 의약품 가격이 OECD 주요국보다 현저히 높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 보건복지부(HHS) 산하 기획평가 담당 차관보실(ASPE)이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미국의 제조업체 총 약가는 OECD 33개국 가격의 278%로 조사됐다. 이는 미국과 비교국에서 사용 가능한 모든 처방약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인데, 다른 나라의 가격은 미국 가격의 36%, 3분의 1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해석이다.
개별 국가들과 비교하면, 캐나다보다 229%(캐나다의 약가가 미국의 44% 수준)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멕시코 대비 172%(미국의 약 36.8% 수준), 터키 대비 1028%(미국의 약 8.9% 수준)로 확인됐다. 오리지널에서 가격 차이는 더 벌어졌다. 미국 브랜드 약가는 비교국 대비 422%를 보였고 이는 제약사가 보험자와 의약품급여관리자(PBM)에게 지급하는 리베이트를 감안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30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정책 기조를 반영해 의약품 관련 정책을 잇따라 발표하며 제약바이오 시장에 파장을 몰고 왔다.
실제 지난 5월 5일, 트럼프는 미국 내 제약 제조기반 회복을 촉진하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12일에는 미국 내 처방의약품 가격 등을 유럽 등 선진국과 동일한 수준으로 낮추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사인했다. 20일 케네디 HHS 장관 발표에 따르면 최혜국(Most Favored Nation, MFN) 약가 목표를 미국 1인당 GDP 60% 이상인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가격으로 책정할 것으로 정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7월 31일 화이자, 머크, 존슨앤드존슨, 암젠, GSK, 애브비, MSD, 노바티스, 노보 노디스크 등 17개 글로벌 제약사 최고경영자(CEO)에게 서한을 보내, 자사 약가를 '최혜국 대우' 수준으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 이는 동일 의약품에 대해 해외 주요국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기준으로 미국 내에도 동일한 수준의 약가를 적용하라는 요구다.

또한 서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제시된 대부분의 제안은 책임 회피와 산업계 지원 요청에 불과했다"며 "이제 미국 가계에 즉각적인 가격 인하 효과를 주는 약속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업계가 응하지 않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도 경고했다. 행정명령에는 HHS를 통한 약가 규제 규칙 도입, 의약품 수입 확대, 수출 통제, FDA 승인 취소 검토 등의 대응 방안이 포함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업계에 60일의 시한을 부여하며, 9월 말까지 답변을 요구한 상황이다.
이처럼 세계 최대 의약품 소비국인 미국의 의약품 관련 정책 변화는 글로벌 빅파마와 바이오텍의 비즈니스 모델 전면 수정과 신약 개발 일정 조정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의 의약품 수입 중 한국 비중은 2.0%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의약품 수출 중 미국 비중은 18.8%에 이른다. 수출금액으로 따지면 합성의약품 5200만달러(약 725억원), 바이오의약품 11억6100만달러(약 1조6188억원)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의약품 제도변화에 직간접 영향권에 있는 모습이다.
영향력 커지는 글로벌 약가 참조 굴레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MFN 제도가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약가 문제는 수 년간 지적돼 왔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 참고 자료에 따르면 한국 약가는 미국 가격의 10%대 수준일 것으로 추측된다. 구체적으로는 국내 약가 대비 미국의 약가는 7.3배,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2.4배 높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즉, 미국 약가에 비해 국내 약가는 14%, 미국을 제외한 A7 국가 평균 대비 45% 수준이다.
이는 성분 기준 70개, 품목 수 기준 총 117개 약제에 대해 해외 공식약가참조 사이트 기준으로 조사한 것으로, 국내 등재된 모든 신약에 대한 자료는 아니지만 약가가 낮다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재 한국 약가의 영향은 국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참조 체계 속에서 주요 국가들의 약가 책정에도 직접적인 변수가 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융합보건학과 안정훈 교수에 따르면 2013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우리나라 의약품 가격을 공식적으로 참조하면서 한국 약가의 국제적 영향력이 본격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신약 시장 진입 허가 시 '폼 30(Form 30)'이라는 문서를 통해 제약사가 판매 중인 30개국 약가를 제출 받으며 이를 기준으로 약가를 책정하는데 당시 한국이 처음으로 공식 참조국에 포함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약가는 중동 걸프 지역 전체와 북아프리카, 터키 등으로 이어지는 만큼 한국이 포함된 것은 파급력이 컸다. 이후 2018년 중국이 국가의료보장국 설립 과정에서 실시한 12개 약제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도 한국 약가가 최저가로 나타나 중국의 약가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19년에는 캐나다가 신약 가격 산정 시 한국을 공식 참조국에 포함하면서 영향력은 더 커졌다. 캐나다 오리지널제약사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시행됐고, 같은 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A7 참조국'을 'A8'로 확대하면서 캐나다를 포함시켜 양국이 서로 약가를 참조하는 구조가 됐다.
안 교수는 "한국 약가가 국제적으로 참조되기 좋은 이유로 높은 투명성을 꼽는다. 한국은 공단과 심평원이 산정한 약가를 모두 공개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다수 국가에서는 리베이트나 협상 이후 실제 가격을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도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들에 '국제참조가격제(IRP)'를 권고하며 한국 약가는 싸고 투명하다는 점에서 각국이 선호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위험분담제 확대하고, 환급계약제 문도 넓혀야
문제는 한국 약가가 낮게 책정될 경우 이후 참조하는 국가들의 약가에도 영향을 미쳐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신약 출시 시점이 지연되거나 기등재된 약제들의 공급이 불안정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한국 약가의 글로벌 영향력이 확대되는 만큼, 단일가 정책을 고수하기보다는 국제 환경에 맞는 제도적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제약사 약가 담당자는 "예전 회사에 근무할 때 일이다. 효과가 매우 좋은 신약이 있었는데, 한국에 론칭을 하지 못했다"며 "본사가 생각하는 신약의 가치와 정부가 제시하는 숫자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그 사이에서 2~3번 시도를 하는 와중에 중국에서 급여 과정을 밟게 되면서 한국은 뒷전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좋은 약이었고, 해당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이었는데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 몫이 됐다"고 밝혔다.
또다른 제약사 약가 담당 임원은 "다수의 회사가 현재 급여업무 관련 진행을 홀딩하고 있다. 각 나라 상황을 공유하며 회의를 하고 있지만 본사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글로벌 제약사들 사이에서는 불확실한 미국의 약가제도, 글로벌 약가 참조 강화로 신약의 급여등재 과정이 홀딩되는 모양새라는 말이 돈다. 뿐만 아니라 잘 공급하고 있는 약제들도 불안한 상황이다. 계속되는 사후관리로 약가인하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제안하는 방안은 위험분담제 확대를 통해 표시가와 실제가격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이중약가'를 적용하는 것이다. 이중약가는 표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다르다는 의미지만, 어감에서 가격의 불투명성, 절차의 번거로움, 환자 비용 부담 증가 등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K-환급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자는 제안도 있다.
안정훈 교수는 "우리나라가 참조하는 A8 국가들의 약가도 실거래가가 아닌 명목가에 가깝다"며 "국내 약가를 단일가로 고집할수록 해외 국가들의 참조 대상으로 활용돼 신약의 국내 도입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험분담제가 확대돼 국내 수출 의약품도 이중 가격 체계로 운영된다면, 미국 진출 시 불리한 조건을 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환급·가격조정에 따른 리스크 관리 및 컴플라이언스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안 교수는 "글로벌 제약시장은 가격차별 구조가 일반화돼 있다. 단일가 정책을 고집할 경우 경제적 손실은 불가피하다"며 "대외환경 변화를 고려해 위험분담제 확대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KRPIA 최인화 전무는 "한국은 투명한 약가 관리가 장점이지만, 낮은 약가가 이미 중국 등 여러 국가에서 참조되고 있고, 최근에는 미국까지 참조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최 전무는 "이번 MFN 논의로 글로벌 본사들이 한국의 낮은 약가 수준을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위험분담제와 이중약가 확대는 제약업계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안정적 신약 접근성과 국가 차원의 안정적 의약품 공급을 위한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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