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hit | 제품은 팔지만 '가치'는 팔지 않는 K-제약바이오
해외는 '약 안판다' 강조하지만 우리는 '제품' 알리기 집중
몰아치는 보건정책서 당국 설득할 '정서적 근거' 갖춰야

일본 도쿄 긴자 뒷편 마루노우치의 다이이찌산쿄 본사 건물에는 어린이를 위한 약박물관이 있다. 예약을 해야 하지만, 약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몸 안에서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쉽게 풀어낸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형형색색의 체험 프로그램은 어른의 눈길까지 끈다.
이 회사는 첫 ADC 유방암 치료제 ‘엔허투’를 개발한 뒤 매일 여러 방송사에 기업광고를 내고 있다.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와 그를 바라보는 딸, 모두가 참석한 졸업식 장면, 이어 연구진의 모습이 차례로 나온다. 슬로건은 간단하다. 'サイエンス. それは、希望'(사이언스, 그것은 희망).

다케다 역시 산간 오지에 드론으로 의약품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소개하고 주요 프로그램의 메인 스폰서를 맡는다. 창업주 다케다 쵸베이의 가게 터에는 박물관이 있다. 눈을 돌려보면 주말 TV에는 '시오노기 뮤직 페어'라는 음악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제약회사가 자연스럽게 소비자의 눈과 귀를 잡는다.
시선을 돌려보면 미국 화이자는 코로나19 백신 출시 후 'Science Will Win'(과학은 이긴다)라는 슬로건으로 혁신과 신뢰를 강조했다. 존슨앤드존슨이 'For All You Love'(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위해)라는 캠페인으로 흑백 광고를 내세워 반향을 일으킨 일은 지금도 교과서적 사례로 꼽힌다.
독일 바이엘은 본사 박물관을 통해 역사를 홍보하는 동시에 스포츠 메인 스폰서까지 맡고, 스위스 노바티스는 본사 캠퍼스에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운영한다. 이들의 메시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는 약을 팔지 않는다'다.
반면 한국에서는 특정 제품 광고가 주류다. 지금도 뉴스나 인기 드라마 앞뒤의 프라임타임에는 각종 일반의약품 광고가 넘친다. 새 광고가 나오면 보도자료까지 배포될 만큼 관심이 크다. 그러나 제품 광고를 제외하고 기업 광고를 떠올려 보면 '내가 최근에 무슨 광고를 봤지?'라는 의문이 남는다. 업계에 몸담고 있는 나조차 그렇다. 박물관 역시 일부 제약사가 역사관을 운영하지만 접근성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다. '회장님의 출근길을 밝히기 위한' 곳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대중을 상대로 한 박물관은 한독이 사실상 유일하다. 수십 년 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보여주며 '당신이 잠들어도 우리는 잠들지 않는다'며 연구를 강조하던 종근당 광고 같은 사례는 이제 보기 어려워졌다.

물론 라디오 광고나 야구장 스폰서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라디오 광고는 일부가 제작 지원사업에 따른 것이고 순수 기업 광고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후원하는 환인제약 정도다. 야구장 광고도 제품 중심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기업 가치를 홍보할 필요성은 알지만 TV 광고를 집행할 여력이 없거나 경영진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한 제약사 관계자가 약 이름도 안 나오는 광고를 왜 돈 들여 하느냐고 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실제 한국 제약사는 '약 뒤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규제, 산업 구조, 보수적 분위기가 겹치면서 제품 위주의 홍보가 굳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의약분업 이후 전문의약품이 대부분 회사의 캐시카우가 되면서 대중 광고는 일반약을 가진 회사의 몫이라는 인식도 굳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같은 광고나 사회활동이, 우리 제약바이오기업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다국적사는 '신약의 가치 산정'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를 약가 협상의 핵심 근거로 내세운다. 단순히 약효 때문이 아니다. 본사 차원에서 '우리는 약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판다'는 전략과 맞닿아 있다. 반대로 국내사는 제네릭 가격 인하 문제를 두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어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적이 거의 없다.
국민과 보험당국에 '우리가 무엇을 팔고 있는지'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마치 돈 필요할 때만 전화하는 친구와 종종 안부를 전하는 친구 중 누구에게 마음이 끌릴지 뻔한 것과 같다.
이런 가운데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창립 80주년을 맞아 새 건물 안에 역사관을 짓고, 온라인 전시관을 통해 산업 전체를 알리려는 시도는 흥미롭다. 협회는 '역사관은 협회가 아니라 산업과 그 가치를 조명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당장은 해외만큼의 움직임은 어렵겠지만 이제는 제약산업계가 '약팔이'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파는 산업'으로 다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