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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스윙데이즈 - 암호명 A' 공연장에서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일 없이 종일 뒹굴어도 입을 옷이 있고 먹을 밥이 있다면, 애써 사모은 주식이 폭등해 거부를 손에 쥘 수 있다면!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쉬고 싶을 때 쉬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일 줄이야. 우리는 평생토록 일신의 안정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래서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삶은, 평범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터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털어넣고 길거리에 나앉은 만석꾼의 이야기, 출세길을 마다하고 항일 의거에 투신한 이들의 이야기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공감을 사진 못한다. 먹고사니즘이 지배하는 우리네 삶에 '애국', '애족'이란 낱말은 부모님의 잔소리 같은 것이다. 매일 보며 지나쳐도 별 생각이 안 드는, 잘 닦인 광장에 오도카니 놓인 동상처럼 말이다.

뮤지컬 <스윙데이즈 – 암호명 A>의 개막 소식을 듣고서 떠올렸다. 유한양행 본사 1층에 놓인 유일한 박사의 흉상을. 적잖은 이들에게 그의 일대기는 익숙하다. 모 공중파 방송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후로 더욱 그렇다. 그의 삶 전체에서 묻어나오는 비장함, 정직함, 유능함과 같은 미덕은 평범한 우리에겐 잔소리이며 동상 같은 것이다. 좋은 건 알겠는데 굳이 따라하긴 힘든, 하도 많이 보고 들어서 별 흥미가 돋지 않는 것이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충무아트홀로 발걸음을 옮기며, 뮤지컬에서 자칫 그런 느낌을 받을까 조금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픽=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그래픽=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사실 유일한 박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가는 것이 좋을 뻔했다. 포마드 바른 머리에 백색 양복을 입은 배우 신성록이 건들건들 걸어나와 나르시시스트 부자 행세를 하는데, 극 중의 인물들이 그를 '유일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극 중 그의 별명은 미스터 갬블러(Mr. Gambler), 도박꾼이다. 머릿속 반듯한 유일한 박사의 모습과 영 딴판인 모습에 이름마저 다른 인물이 등장하니 인지부조화가 왔다. 유일형은 유일한의 형제인 줄로 착각하고, 20분 정도 '진짜 유일한'은 언제 등장하는지 목 빼놓고 기다렸던 건 기자 혼자뿐이었을 것이다.

극 중 유일형은 자아도취한 젊은 사업가에서 고독한 독립운동가로 서서히 변모한다. 그가 개최한 파티에 숨어든 독립운동가 '베로니카'로부터 "당신은 안전한 곳에서 독립군에게 돈 몇 푼을 쥐여주며 죄책감을 던다"는 일갈을 듣고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일제에 의해 기습 사살당한 베로니카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일련의 사건을 거쳐, 'A'라는 암호명으로 미국 OSS(전략첩보국ㆍ현 CIA의 전신 격)에 자원 입대해 독립운동 기밀작전에 참가하며 뮤지컬은 마무리된다.

창작 뮤지컬인 만큼 <스윙 데이즈>에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버무려져 있다. 유일형은 개명 전 유일한의 이름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해 독립운동을 위한 자산으로 활용한 것도, 병의원 없는 시골에 약을 전달하려 달리는 기차에서 약품을 투척하는 식으로 약 배송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유일한 박사는 실제로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라는 OSS 기밀작전에 'A'라는 코드명으로 참가해, 일본이 점령한 한국 거점으로 침투하도록 훈련받았다.

다만 우리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모습의 유일한 박사가 있기까지의 서사를 알지 못한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 원래 그런 인물이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애초에 유일한 박사의 성품과 업적은 너무나 고결해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다. 대중에게 있어 유일한과 같은 인물은 범접 불가한 '초인'이다. 그래서 그를 따라하며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진 왼쪽부터) 극 중 유일형으로 분한 배우 유준상, 신성록, 민우혁 /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사진 왼쪽부터) 극 중 유일형으로 분한 배우 유준상, 신성록, 민우혁 /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극 중 유일형이 등장하는 장면 /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여기서 영화 '실미도'의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던 작가 김희재의 상상이 빛을 발한다. 허구의 인물 베로니카를 등장시키며 '유일한의 완성에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초인 유일한도, 어떤 계기가 발생하기 전에는 '인간 유일형'이었을 것이라는 당돌한 추측이다.

실제로 극 중에서 등장하는 허구적 요소들은 모두 인간 유일형의 면모를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거부를 손에 쥐고 시가를 피우며 떵떵거리는 모습, 마약성 진통제를 일제 치하에 바쳐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 독립운동을 위해 아내 호메리와 떨어져 지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은 모두 우리가 보일 법한 모습이다. 일신의 안녕을 바라는 '인간'과 이상을 위해 세속적 가치로부터 탈피한 '초인' 사이에서, 우리도, 유일형도 갈등한다.

'초인(위버멘쉬ㆍ übermensch)'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낙타, 사자, 어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세속적 기준에 따라 안녕만을 바라는 낙타의 단계, 세속적 기준에 반항하며 고통받는 사자의 단계, 그 고통마저도 삶의 일부이자 놀이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의 단계를 거쳐 한 인간은 초인으로 거듭난다. 극 중 유일형은 낙타처럼 등장해, 베로니카의 죽음을 계기로 사자가 되어, 종국엔 험난한 독립운동마저 기쁘게 수행하는 어린이, 유일한으로 변모한다.

즉 유일한을 움직였던 동력은 기쁨이며 즐거움이었다. 그는 검소, 정직, 근면, 애국이란 가치를 지키려 고통을 참아가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런 가치들은 그 자체로 유일한에게 체득된 삶의 자세였고, 거기서 파생되는 괴로움마저 즐거움의 일부였을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 유일한이 살다 갔던 삶의 본질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이른다. 그 어떤 고통을 주어도 나를 기쁘게 할, 나만의 고고한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글을 읽고 있을 대부분의 독자들과 기자가 종사하는 제약ㆍ바이오 업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거진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신약과 첨단 의료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이 추구했던 초인의 자세가 깃들었음을 떠올리다 보면, 그 마음이 터질 듯 경외롭고 이내 경건해지고야 만다. 우리는 그야말로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도시를 세웠다.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천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중

그러니 뮤지컬의 최종장에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던 건 아닌 것이다. 쌓아온 모든 걸 버리고 OSS의 기밀작전에 참가하게 된 유일형, 아니 유일한이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까딱까딱 그루브를 타며 커튼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우린 어떻게 살 것인가? 고귀한 가치를 품고서 진정으로 향유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초인 유일한, 이 땅의 위버멘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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