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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퀀스의 성공은 '주도하는 투자자'가 일궈낸 것…한국 VC에 남은 숙제는

바이오 인터내셔널 2024로부터 2개월, 아직도 머리 꼭대기엔 샌디에고에서 업어온 고민이 서성입니다. 해를 넘겨가며 품어온 물음인 '한국 신약개발을 어떻게 부흥시킬 것인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예리한 개발전략이 해결책의 전부가 아닌 겁니다.

미국에서 화면 너머로 만났던 더글라스 팸브로(Douglas Fambrough) 박사는 밴처캐피탈(VC)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960년대에 VC가 태동할 당시만 해도, 그 구성원들은 기업의 전 대표나 임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들은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 하나를 일궜던 경험을 기반으로 적절한 조언을 던졌습니다.

그가 안타까워했던 건 VC의 멘토 정신이 미국에서마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막 박사 학위를 마쳤거나, 막 약사ㆍ의사가 된 이들이 심사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오텍을 평가하고 투자하는 기술은 탁월할진대, 조언하며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줄어들었습니다. 팸브로 박사의 이야기는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바이오 인터내셔널 현장에서 만난 미국 VC 대표에게도 건넸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레 '성공적인 신약 바이오텍을 길러내는 VC의 자질은 무엇인가?'로 흘러갔죠. 어쩌다 그랬는지는 몰라도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의 사례가 나왔습니다.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 아시죠? 모더나(Moderna) 창업시킨 VC요. 여기가 기획창업을 독특하게 해요. NCBI(미국 국립생물공학정보센터)에 들어가서 논문을 막 뒤지다가, '이거다' 싶은 연구가 보이면 저자한테 연락하는 거예요. 그 저자를 대표로 앉히든 임원으로 앉히든 해서, 투자 끌어오고 직원 끌어오고. 회사를 조립하는 거죠."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VC 기획창업이 한국에서 가능한 모델인 것인지 고민됐습니다. 수준급의 네트워킹, 그것도 한국에 한정되지 않은 글로벌 네트워킹이 전제돼야 가능한 모델 같았습니다. 또 기술에 대한 VC 구성원의 이해도가 매우 높아야 할 겁니다.

팸브로 박사의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어려웠습니다. 한국엔 아직 글로벌 신약을 상업화시킨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거기 관여한 인원들이 VC 생태계로 들어오기까진 시간이 걸리고 그 수도 적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독자분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한국 VC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기획창업을 하라는 건지, 바이오텍 전 임원을 영입하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자의 머릿속이 그랬습니다. 이 수많은 해결책에는 공통적인 본질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브루비카와 칼퀀스의 제품 로고 / 그래픽=애브비, 아스트라제네카
임브루비카와 칼퀀스의 제품 로고 / 그래픽=애브비, 아스트라제네카

그런 고민 속에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계열 내 최초(First-in-Class) BTK 저해제인 '임브루비카(IMBRUVICAㆍ성분 아이브루티닙 Ibrutinib)'와 2세대 BTK 저해제인 '칼퀀스(CALQUENCEㆍ성분 아칼라브루티닙 Acalabrutinib)'의 개발기를 다룬 <For Blood and Money>(저자 Nathan Vardi)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적 없는, 바느질 세트 회사와 베이커리를 운영하던 한 사람이 블록버스터 항암제를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또 임브루비카의 성공에 함께했던 이들이 블록버스터 신약이란 '벼락 맞을 확률'에 또다시 베팅해서 승리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느냐에 따라 책에 대한 감상은 달라지겠지만, 가장 돋보였던 이들은 단연 웨인 로스봄(Wayne Rothbaum)을 필두로 한 투자업계 관계자들입니다. 임브루비카의 원 개발사인 파마사이클릭스(Pharmacyclics)에 주식투자를 하던 로스봄은 파마사이클릭스에서 해고당한 3명의 개발진에게 연락해, 에이서타(Acerta Pharma)를 공동창업하며 차세대 BTK 저해제인 아칼라부르티닙, 즉 칼퀀스를 개발합니다.

그 개발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칼퀀스는 몇 번이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는데요. 그 위기의 순간마다 로스봄과 VC들이 전략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창업진이 원래 개발하려던 물질은 아칼라브루티닙이 아니었습니다. 헌츠맨 암 연구소(Huntsman Cancer Institute)에서 확보한 BTK 저해제가 첫 파이프라인이 될 뻔했죠. 하지만 이들이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 Morgan Healthcare Conference)에 참가해 발표를 진행하자, 에드워드 반 위젤(Edward van Wezel)이란 VC 심사역이 대뜸 "난 당신들 물질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피드백합니다. 그리고는 "당신들이 관심있어 할 만한 과학자들을 소개해주겠다"며, 오가논(Organon)의 BTK 저해제 개발진과 그들이 개발 중이던 후보물질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렇게 아칼라브루티닙이 첫 파이프라인이 됩니다.

또 아칼라브루티닙은 항암제로 개발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로스봄을 제외한 창업진이 '아칼라브루티닙 대신 ROR1 기전의 신약을 개발하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인데요. '아칼라브루티닙을 항암제로 개발하는 권리는 라이선스 인(License In)할 수 있지만,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로 개발할 수 있는 권리는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공동창업자인 아흐메드 햄디(Ahmed Hamdy)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한 로스봄의 응수가 볼만합니다.

…(아칼라브루티닙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로스봄은 머리카락이 세어지는 걸 느낄 지경이었다. 그는 (ROR1 신약에 대한) 포스터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아흐메드, 대체 뭐 하는 짓이요?" 로스봄이 따졌다. "자가면역질환 권리는 상관없어. 암에 집중하잔 말이요. 우리는 암에 포커스를 둬야 한다고요. 이건 미친 짓이야!"

-For Blood and Money(원서), 127pg 중-

이렇게 아칼라브루티닙을 항암제로 개발할 것을 못박은 후로도 로스봄과 VC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위젤은 아칼라브루티닙의 항암제 개발 권리를 에이서타로 성공적으로 라이선스 인하는 과정을 총괄했습니다. 로스봄은 아칼라브루티닙을 외투세포림프종(Mantle Cell Lymphoma) 치료제로 가속승인(Accelerated Approval)받는 전략을 밀어붙입니다. 여기 반대하던 창업자 중 하나를 CEO자리에서 해임하면서까지 말이죠.

로스봄이 의도한 대로, 아칼라브루티닙은 칼퀀스란 제품명으로 2017년에 외투세포립프종 치료제로 가속승인되며 시장에 빠르게 진입했고, 2019년에 만성림프구백혈병(Chronic Lymphocytic LeukemiaㆍCLL)과 소림프구림프종(Small Lymphocytic LymphomaㆍSLL) 치료제로 허가되기에 이릅니다.

칼퀀스 개발기를 되새기다 보면, '바이오텍 투자사, 나아가 VC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두고 많은 생각이 피어오릅니다. 에이서타에 투자하며 벤처캐피탈리스트로 변모한 웨인 로스봄은 매우 적극적으로 경영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칼퀀스가 항암제가 되도록, 가속승인을 통해 빠르게 시장에 도달하도록 전략을 짜고 경영진을 들들 볶습니다. 또 에이서타에 시드 투자를 집행했던 VC 심사역 에드워드 반 위젤은 회사의 초기 멤버를 결성하고 초기 파이프라인을 확보합니다. BTK 저해제에 대한 학술적인 이해가 깊었고, 이에 연관된 개발진을 글로벌 단위로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팸브로 박사와 미국 VC 대표의 이야기를 엮어 돌아보겠습니다. 팸브로 박사가 말한 원조 VC의 소양이란 '멘토이자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VC 대표가 예로 든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은 기술을 중심으로 회사를 만드는 기획창업에 조예가 깊습니다. 웨인 로스봄은 에이서타에 대한 지분 투자를 넘어 경영에 깊숙히 개입했고, 에드워드 반 위젤은 시드 투자를 넘어 개발팀 결성과 물질 확보를 지휘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공유하는 느낌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도하는 투자자'였다는 겁니다. 유망한 기술에 투자하곤 잠자코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기술이 실제로 시장에 도달해서 수익을 내는 제품이 될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돈이 부족하면 돈을 끌어왔고, 물질이 이상하다면 다른 물질을 가져왔고, 개발진이 부족하다면 수소문해서 인력을 붙였고, 전략이 이상하다면 직접 개입해서 개발을 지휘했고, 필요에 따라선 경영진을 교체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바이오텍 투자업계를 취재하다 보면, '돈이 부족하면 돈을 끌어온다' 이후의 과정이 그리 선명하지 않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바이오텍과 VC 사이의 소통은 분기ㆍ반기보고서를 제출하는 때, 추가 투자를 집행할 때에 한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려옵니다. 비상장 바이오텍에 근무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투자한 바이오텍의 경영진을 신뢰하기 때문에 터치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또 혹자는 말합니다. '투자 포트폴리오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하나하나 신경쓸 수가 없다'고 말이죠. 분명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물음은 채 가시지 않습니다. 혹시 그 신뢰가 방관으로 바뀌어가는 건 아닐까요? 회사 하나하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면, VC에게 남는 역할은 투자와 투자 회수뿐인 게 아닐까요?

사실 조심스럽습니다. 이 글이 '한국 VC는 부족하다'는 메시지 정도로 읽힌다면, 기자의 필력이 부족한 겁니다. 분명 한국의 VC들은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 투자문화가 조성된 미국의 사례, 더 좁혀서 칼퀀스의 개발 사례를 기준으로 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그러니까 '기술이 시장이 이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이오텍만의 임무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투자를 집행한 이상 VC도 바이오텍의 일부인 겁니다. 창업자가 초기 지분투자를 했다는 명분으로 실무진에게 모든 걸 맡겨버리지 않듯, VC도 창업주의 마음으로, 경영진의 마음으로 기술을 시장에 데려다 줬으면 합니다. 돈이든, 사람이든, 기술이든, 부족한 것이 무엇이 되었든 구해다 주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첨언입니다. <For Blood and Money>를 읽다 보니, 왠지 모를 근거 없는 자신감이 피어오르더라는 겁니다. 처음에 길을 잃고 헤메던 임브루비카도, 하마터면 딴 길로 샐 뻔했던 칼퀀스도 고작 몇 명의 의지만으로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거듭났습니다. '좋은 약을 환자에게 주겠다'는 개발진의 의지, '수익성 높은 제품을 시장에 도달시키겠다'는 투자진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시작돼 유종의 미를 거뒀습니다. 우리도 못할 게 있겠습니까? '이 쉬운 것을 왜 여태 못했나'라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모두에게 장착됐으면 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어처구니없지 않은 지경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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