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 신년초대석①] 과학자로 30년 외길 걸어온 정혜선 박사

물리화학과 메탈리카, 커트코베인까지
청년 정혜선(이학박사)이 의과학자의 길로 들어선 건 조금은 우연적인 일이었다. 요즘말로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학(어쩌다 학자)' 쯤 될까. 학창시절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공부 잘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연구실 벽면에 지금도 LA메탈의 주류 중 하나였던 '메탈리카'나 얼터너티브 락의 선두주자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피규어를 진열할 정도로 락음악을 좋아했던 열정적인 청년이기도 했다.
"대학에는 원했던 대로 화학과에 진학했는데, 다른 과목에 비해 물리화학 과목이 유독 뒤쳐졌어요. '포기하더라도 한번 열심히 해보고 포기하자'는 심정으로 물리화학에 파고들었는데, 공부할수록 더 흥미가 생기더라구요."
청년 정혜선은 이를 계기로 물리화학 전공으로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이학자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혜선은 이후 27세되던 1988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때 논문주제가 지질의 물성 연구였다. 지질은 탄수화물, 단백질과 함께 우리 몸을 구성하는 3대 요소인 지방의 일부다. 지질의 물리화학적 성질, 에너지, 물성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질이 약물전달체계와 연관이 깊다는 걸 알게 됐다.
지질연구에서 약물전달체계로 관심 넓혀
"논문주제도 그렇고 흥미도 생겨서 약물전달체계를 연구하는 실험실에 박사후과정으로 추천받아 가게 됐어요. 당시 프리젠테이션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죠."
정혜선은 이렇게 정부출연연구기관이면서 국내 기초과학연구의 산실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몸담게 됐다. 미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한국에 돌아온 직후인 1996년 어느날이었는데, 당시만해도 그는 생명과학분야에는 아는게 거의 없었다고 회고했다.
"처음 연구과제가 지질 에멀전을 이용하여 유전자 전달체계를 개발하는 실험이었어요. 지금은 고대의대에 재직하고 있는 김태우 교수가 학생시절 연구에 참여했는데 6개월간 그 학생에게 과외 아닌 과외를 받고서야 조금씩 생명과학분야를 이해할 수 있게 됐죠."
이 연구는 이학자인 그가 의과학자로 한 걸음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정혜선은 38세에 199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생체과학연구부 선임연구원이 된다. 이 해는 그에게 '인생역작'을 만나는 중요한 해이기도 했다. '리포락셀액'이라는 획기적인 항암제를 탄생시킨 '고효율 항암제 개발사업'에 참여하게 된 해이기 때문이다.
'고효율 항암제 개발사업'과 리포락셀의 서막
화학연구원의 이해방 박사가 사업단 단장을 맡았던 연구과제의 세부과제로 참여하게 된 이 연구는 주사제로 돼 있는 항암제를 경구용으로 제형을 변경하는 과제로 산업과학부가 주관부처였다. 기업은 대화제약이, 연구자로는 그와 함께 고대약대(당시 한남대) 윤순홍 교수, 중앙대 최영욱 교수, 서울의대 성승용 교수 등이 참여했다. 타깃은 암치료에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파클리탁셀(오리지널 비엠에스제약의 탁솔).
정혜선은 파클리탁셀 복합제형화 기술개발(1999~2004, 산업부), 흡수기전 및 제형연구(2002~2007, 보건복지부), 독성·안전성 연구(2005~2007), 임상시험 및 허가승인(2008~2016) 등 리포락셀액 개발 17년에 걸친 전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글로벌 제약기업들이 앞다퉈 경구용 전환 연구를 수행했다가 실패했다는 점에서 정혜선과 국내 연구진, 대화제약의 리포락셀액 개발성공의 가치는 크다. 그만큼 개발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고, 해프닝도 많았다.
정혜선은 세번의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했다. 이는 리포락셀액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이 세번 있었다는 의미다.
변곡점마다 난관 돌파한 세번의, 샴페인의 기억
"파클리탁셀은 당시 글로벌 매출 1~2위를 기록한 블록버스터 약물이었어요. 이 약물을 경구제로 전환하기 위한 논문들이 막 나오기 시작했던 때였고, 경구용 전환이 안되는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죠. 우리 과제는 이걸 극복하는 것이었죠."
약물전달체계는 약물 제제, 루트, 경로 전환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혜선에게 이 분야는 오랜 관심사였던 만큼 승부욕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의약품 개발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한 단계 한 단계를 넘어 서기가 쉽지 않았다. 신약개발이나 DDS 기술역량은 언감생심이었다. 문제에 봉착해도 마땅히 자문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첫번째 문턱은 파클리탁셀의 낮은 용해도를 극복하는 일이었어요. 어렵게 녹는 제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장 속에 들어가면서 물에 섞여 '석출(돌)'되는 현상 때문에 난관에 부딪쳤죠. 첫해는 아무런 성과없이 그렇게 지나갔어요. 고통스러운 시간이였죠. 두번째 해부터 제제를 변경하면서 진행하는 실험법과 분석법을 알게 됐죠. 중앙대 최영욱 교수께서 분석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줘서 가능했어요."
8년 프로젝트였던 산자부 연구는 5년에 조기 달성됐다. "제제를 만들어서 동물실험을 하는데 흡수율이 생각보다 안나와서 고민했어요. 그런데 최영욱 교수께서 해외학회에 갔다가 다른 연구들의 성과보다 우리 데이터가 더 좋다는 걸 발견했죠. 우리 흡수율이 (다른 연구결과와 비교해) 너무 좋아서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어요. 당시 대화제약이 액체크로마토그래픽(LC) 기계를 새로 구입했는데, 회사 측도 처음엔 믿지 않다가 샘플테스트를 해보고 인정했죠."
정혜선은 너무 신이 나서 황홀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첫번째 샴페인을 이렇게 터뜨렸다.
서툰 해프닝...'황금돼지(?)' 네 마리의 추억
동물실험을 돼지로 수행한 건 해프닝이었다. 당시 모 다국적제약사 부사장이 쥐 실험 뒤에 사람과 유사한 돼지 실험을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준 것이다. 실험용 돼지는 가격도 비싼데다가 구하기도 어려웠다. 국내에 4마리를 들여오는 데 8개월이 걸릴 정도였다. 통관도 까다로웠다. 더구나 실험결과도 기대 이하였다. 4마리 중 1마리만 좋은 성과를 얻었다. 정혜선은 "데이터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활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했다. 이후 쥐와 개 실험을 진행했는데, 개 실험은 미국 CRO기업인 코방스에 의뢰했다.
대화제약이 주도한 임상1상도 결과가 생각보다 좋아서 불안할 정도였다. 정혜선 등은 네덜란드에서 경구용 파클리탁셀 개발 임상에 참여했던 미국 세인트주드 어린이병원의 알렉스 스파붐 박사와 어렵게 만나 데이터를 검증받았다.
"스파붐 박사가 일요일에 잠깐 '짬'을 내서 우리와 만났는데 데이터를 보고 매우 긍정적인 의견을 줬죠. 다음 단계인 2A임상을 어떻게 할 지 고민이 많았는데, 스파붐 박사와 만난 뒤 근심을 다 해결됐죠. 그날은 너무 신이 나서 칵테일 파티를 할 정도였어요."

해외 석학에게 인정받은 데이터..."마음을 놓게 됐다"
두번째 샴페인의 기억은 이렇게 어느 일요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만들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2A 임상이 끝날즈음 허가규정이 변경됐다. 이전에는 3상임상을 하지 않아도 허가가 가능했는데, 위암처럼 유병률이 높은 암은 3상 데이터를 제출하도록 바뀐 것이다. 이후 서울아산병원 등 12개 임상시험기관에서 전이성 또는 재발성 위암환자들을 대상으로 3상 임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탁솔과 비교해 무진행생존기간, 전체생존기간 등에서 비열등하다는 걸 입증해 위암치료 표준요법제로 드디어 2016년 9월 국내 시판허가를 받았다. 경구용 파클리탁셀의 세계 최초 허가였고, 3번째 샴페인이 터진 날이었다.
"리포락셀액 개발은 초기부터 관심을 가져준 대화제약 회장님의 역할이 매우 컸죠. 그런데 보험약가를 제대로 못받아서 2년이 넘도록 본격 출시를 못하고 있다니 17년간 함께 해 온 연구자로서 회사 측에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 마지막 샴페인을 언제쯤 진열장에서 꺼낼 수 있을 지..."
의과학자로서 정혜선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보험당국의 룰'을 덮어놓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다만 "약가이슈가 잘 해결돼 하루 빨리 경구용 파클리탁셀이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리포락셀, 이제 마지막 샴페인 꺼낼 때
한편 17년간 리포락셀액을 개발하면서 국내 의약품 개발 현실을 민낯으로 경험해 온 정혜선은 최근 제약산업의 변화가 놀라울 정도라고 평가했다.
"2010년 쯤 동아제약 연구소장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실패 사례만 쭉 나열했었어요. 그런데 10년 쯤 실패를 바탕으로 이제는 동아제약이 신약개발기업으로 거듭났죠. 최근에는 신약 파이프라인을 한 두 개 정도 갖고 있는 제약사들이 많아요. 정말 격세지감이죠. 자동차로 비유하면 부품을 사다가 조립만 하던 시절에서 불과 20년 사이에 브랜드카를 생산할 정도로 발전한 셈이에요."
정혜선은 특히 자신의 전문분야기도 한 DDS기술에 주목했다. "DDS학회를 가보면 일본과 한국이 선두를 달리고 있어요. 국내 기업 중에는 한미약품의 역량이 크죠. 이 분야를 잘 개척하면 글로벌 개량신약 개발에, 나아가서는 글로벌 신약개발에 중요한 밑거름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DDS에 대한 관심이 약가제도상의 문제로 우회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리포락셀액 사례도 있지만 정부가 기술개발을 유인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법을 제시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국내 의약품 개발역량 '점핑'..."격세지감 느낄 정도"
그는 리포락셀액 개발과정에서 식약처의 도움과 한국 정부의 규제과학 발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또 최근에는 여러 부처들의 연구과제가 많아서 연구비가 없어서 좋은 연구가 사장되는 건 별로 없다고 했다. 의외인 건 과제를 수행한 뒤 다음 과제로 넘어가는 길을 찾을 정보를 얻지 못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연구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복지부 신약개발지원센터 등과 같이 원스톱 지원체계가 있는데도 연구자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정부 과제를 어떻게 수주하고, 적절한 실험 파트너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지 등 종합 컨설팅이 활성화되면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봐요."
정혜선 박사는 누구?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80학번)를 나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1986년 이학석사를 취득했다. 한림대에서 잠깐 조교생활도 했다. 1988년 미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았고, 1994년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2년 뒤인 199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생체과학연구부에 박사후과정으로 들어가 줄곧 연구원에 몸담고 있다.
1999년 같은 연구부의 선임연구원이 됐고, 3년 뒤인 2004년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2014년 4월부터 현재까지 중소기업지원센터(센터장 제해준 박사)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전문분야는 ▲지질의 물성연구 ▲약물전달체계 개발 ▲단밸질과 고분자, 지질 및 약물의 상호작용 연구 등이다. SCI 논문 37편을 발표했고 특허 25건(등록 12건)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책임자로 8건의 연구도 수행했다. 2003년 '먹는 항암제'를 개발했고, 2005년 '고형 먹는 항암제'를 대화제약에 기술이전했다.
수상경력은 Presidential Dissertation Award(1993, Procter& Gamble/ Ohio State Univ.), Excellence in Chemistry Award(1994, Hoechst Pharma/ Ohio State Univ.), 박원희 연구상(2004, 한국과학기술연구원), Eurand Award(먹는항암제, 2004, Eurand, Controlled Release Society),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표창(2004, 기초기술연구회), 국무총리상(2005, 과학의날, 과기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