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터뷰 | 홍성용 웨스트파마슈티컬 한국지사 대표
약물 용기, 간단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온갖 글로벌 규제 대상
웨스트파마슈티컬 제품, 모더나 코로나19 백신 용기로 사용
"약물마다 적합한 용기 달라…후보물질 개발과 용기 개발 병행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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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웨스트파마슈티컬(West Pharmaceutical)이 한국에서만 판매한 제품의 개수는 8억개다. 작년 한 해 팔린 박카스의 판매량인 5억병보다도 많다. 하지만 웨스트파마슈티컬이 취급하는 주요 제품은 드링크도, 건강기능식품도 아니다. 그 제품의 정체는 바로 고무마개와 유리병, 그리고 유리병의 뚜껑이다.
웨스트파마슈티컬은 미국에 위치한 주사제 의약품 포장재 개발ㆍ제조업체다. 회사가 취급하는 주력 제품은 넓게 분류하자면 매우 단순하다. 의약품을 담을 '바이알(Vial)', 바이알의 입구를 막는 '고무마개(Rubber Stopper)'와 그 위를 덮는 뚜껑인 '씰(Seal)'이다. 이들을 포함한 웨스트파마슈티컬 제품들은 세계 점유율 약 60%, 한국 점유율은 약 50%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웨스트는 고무마개 개발 및 생산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혹자는 '자잘한 소모품' 정도로 여길 수 있는 품목이다. 홍성용 웨스트파마슈티컬 한국지사 대표는 "나도 한때는 그렇게 여긴 적이 있었다"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홍성용 대표는 한국 바이오 산업의 시작을 함께한 이른바 '개척자'다. 이제는 바이오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기인 실시간 중합효소연쇄반응(Real-time PCR) 기기를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시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초창기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단백질 분리정제 과정이 처음 구성될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후 임상 데이터 플랫폼 회사를 거쳐 이제는 웨스트파마슈티컬의 한국 지사를 이끌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약품 개발의 전주기를 경험하고, 이제는 그 끝단을 다루는 중"이다.

그의 말처럼 웨스트파마슈티컬의 제품들은 의약품 개발의 저 끝에 함께한다. 신약을 개발하려면 신약 물질을 생산해야 한다. 신약을 생산했다면 동물에 실험해봐야 한다. 동물실험 결과가 괜찮았다면 이제 인간에게 시험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끝단의 단계가 있다. 물을 마시려면 컵을 써야 하듯이, 약을 사람에게 투여하려면 약을 담을 '용기(container)'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단순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온갖 글로벌 규제의 대상이다.
홍 대표는 "약물은 보관 용기의 내벽에 상시 닿아 있으며, 계속해서 입구 쪽의 고무마개와도 접촉한다"며 "이러한 과정에서 약물은 물리적 또는 화학적으로 변성되거나 오염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사기로 2번 이상 약물을 빼내야 하는 경우 도중에 공기가 유입되는 등 오염의 소지가 있으며, 고무마개가 바스라져 그 잔해가 유입될 수도 있다"며 "이뿐만 아니라 약물이 고무마개와 화학적으로 반응하거나, 고무마개의 성분이 약물로 녹아드는 등 약물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웨스트파마슈티컬이 각종 약물에 맞는 고무마개를 매번 다른 조성으로 개발해 제작하는 이유다.
이에 주요 국가들의 규제당국은 약물을 담는 용기의 제조기준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홍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그 기준은 최근 들어 점차 까다로워지고 있다. 일례로 유럽에서는 'EU GMP Annex 1'이라는 규제가 신설, 의약품 용기의 취급에 강화된 심사요건을 적용 중이다.
홍 대표는 이러한 추세를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들에게 필히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해외향 라이선싱 혹은 제품 발매를 계획하는 제약바이오 회사들에게 있어 더욱 그렇다. 그는 "한국 신약 개발에서 바이오로직스(Biologicsㆍ생물학적 제제) 비중이 높아지면서 (바이오로직스를 알맞은 조건에서 보관 가능한) 약물 용기 개발에 대한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며 "신약 자체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물을 아무 이상 없이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용기의 개발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은밀하게 위대하게' 이뤄진 웨스트파마슈티컬의 행적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웨스트파마슈티컬은 팬데믹 당시 대중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다.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을 담은 용기가 웨스트파마슈티컬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홍 대표에 따르면 용기의 개발도, 그 안의 고무마개의 개발도 백신에 발맞춰 이뤄졌기 때문에 적시에 백신 공급과 접종이 가능했다. 바이알 하나, 고무마개 하나가 인류 보건과 신약 개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이제 웨스트파마슈티컬은 그늘에서 걸어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 해외로 진출하길 바라는 많은 기업들에, 글로벌 신약의 감춰진 얼개인 용기 개발을 설파하기 위해서다. 홍 대표는 "나 자신조차도 약물 용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 있었으며, 이것이 소통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며 "때문에 여태 많은 벤처들을 만나오며 항상 용기 개발이 신약 물질 개발과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웨스트파마슈티컬은 이제 그림자에서 벗어나 기업들과 활발히 소통하며, 아는 바를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 나가려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