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HIT
2023년 벌어지고 있는 소아의료 공백에 대한 단상

얼마 전 주말 저녁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먹을 걸 연거푸 토해냈다. 낯빛도 파리해졌다. 이걸 어쩌지 당황할 새도 없이 지갑만 챙겨 응급실로 향했다. 얼마전 봤던 기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인 모 대학병원 소아응급실 운영 시간이 밤 10시까지로 단축된다는 내용이었다. 현재 시각 8시 50분. 밤 10시가 지나면 이마저도 갈 수 없으니 앞뒤 안보고 얼른 병원으로 향했다.
초조한 대기 시간을 거쳐 진료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진단과 함께 의사가 말했다. "집에 가서 약을 먹여보시고 약을 못 먹을 정도로 토하거나, 연속해서 두어번 이상 구토가 이어지면 다시 오세요. 제가 오늘 당직이라 밤새 있거든요. 접수실에서 제 이름을 대며 '심해지면 다시 오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말하면 들여보내줄 겁니다."
구내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으로 오며 이 의사가 당직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한밤 중 갈 수 있는 소아응급실이 있다는 게 암흑 중 만난 등대 불빛처럼 느껴졌는데, 그 불빛이 밤 10시가 지난다면 꺼진다니. 걱정과 공포에 소아의료 공백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나마 사는 동네는 나은 편이라는데도 이 정도다.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소아과가 3곳이나 있고, 감기 시즌에도 대기 1시간 내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당장 경기권으로만 가도 소아과 진료 받기가 쉽지 않다 했다. 응급실 아닌, 동네의 '일반 소아과' 진료 말이다. 오전 9시 땡 치자마자 '똑딱' 어플로 접수를 해야하고, 그 마저도 오전 진료 마감이 '30초 컷'이라 했다. 친구는 덧붙여 말했다. "우리 언니는 지방에 사는데 조카 진료받으려면 차로 30분을 가야한다고, 우리 정도면 다행인 거라 하더라."
그래서 최근 소아과 전문의들이 소아과 유지가 어렵다며 폐과를 선언한 뉴스는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았다. 의사들 사이에 소아과는 기피 대상이고 그래서 지원하는 의사도 없거니와 현재 운영 중인 소아과들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진료를 계속할 수 없다 한다. 사명감만으로는 소아 진료를 계속할 수 없어 '폐과'를 선언한 의사들이 며칠 전에는 소아용 의약품까지 대다수가 품절이라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아과는 운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상황이고, 소아 의약품은 다빈도와 희귀의약품을 막론하고 공급이 어렵다니. 지금 이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대한민국의 21세기 모습이다.
가장 큰 원인은 저출산이라고들 말한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아 소아 의료서비스 시장이 전반적으로 위축됐고,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부진하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돈이 안 되는 모든 사양 산업은 자연소멸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시장논리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자 결과일까. 소아 환자가 줄어들었으니 '아직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집들은 '어쩔 수 없다'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저 아이가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체념하기엔 우리나라가 너무나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이제는 선진국이라 자부하고 몇 해 전에는 G7에 들었다고 축포를 터뜨리지 않았나.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에는 정부가 있고, 각계 부처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선진국이라 해서 사회문제가 없을 수 있겠냐마는, 아이가 아플 때 갈 병원이 없고 의약품이 없다는 문제는 그저 그런 사회문제 중 하나로 치부하기엔 국민에게 있어 너무나 기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다.
학교와 교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혼자서도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서는 못하는, 선생님과 시스템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위한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존재 이유는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사는, 부자이거나 똑똑하거나 뒷배가 든든한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불편을 겪어야 하는 계층을 위해 정부는 존재한다. 정부의 복지와 정책은 그래서 평균 혹은 평균 이하의 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계층, 가장 대표적인 게 아동과 노인들이다. 이들의 숫자가 얼마이건 아이와 노인 수가 늘어나건 줄어들건 정부는 이들을 위한 정책을 소홀히 해선 안된다. 하물며 지금 아이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는 소멸 일보 직전이다. 정부가 손쓰지 않으면 소아과 의원과 응급실, 소아의약품 상황은 점점 더 열악해질 것이다. 시장성이 계속 저하되고 어느 누구도 손해를 감수하며 나서지 않을테니 말이다.
소아과와 소아 의약품에 관해선 선진국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 대한민국은 지금 아이들의 건강에 대해선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