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산 원료 먼저 쓰는 일본 완제제약사들
얼마전 원료의약품제조사 고위 관계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완제의약품 허가 신청시, 원료의약품 자료를 연계해 심사하는 것을 골자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추진 중이던 '원료의약품 등록에 관한 규정 개정'이 국내 완제 제약회사들이 국내 원료의약품을 우선적으로 쓰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희망가득한 질문이었다. 원료의약품 산업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터라 나역시 엔돌핀이 솟았다.
'완제 제약회사들이 원료업체를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이기도 해서, 기대감을 갖고 완제 제약회사 관계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을 문의해 보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번째 대답부터 신통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종전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케이스별로 그럴수도 있을지 모른다고는 했다. 케이스를 언급한 것은 질문한 사람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소셜 스마일' 같은 것이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전화를 했던 원료사 관계자에게 완제사들의 입장을 말하지 못했다.
국내 원료의약품 업계는 제약바이오가 크게 각광받는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더 슬픈 모습이다. 2018년 발사르탄 원료의약품에서 NDMA가 검출됐을 당시 원료의약품 대부분이 저가 중국산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던 우리 사회는 품질확보를 위해 국산 원료의약품을 육성해야 한다며 여론에 불을 지폈지만 유야무야 됐다. '원료의약품의 대형마트'라는 중국 대륙이 코로나19로 갇혔을 때도 원료의약품 구매선 다변화 차원에서라도 국산 원료의약품을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잠깐 회자됐으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국산 원료의약품 산업은 현재 악성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내수에서 외면받고, 글로벌로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완제 제약회사들은, 일본 제약회사들이 자국산 원료 다음의 선택지로 '메이드인 코리아 원료의약품'을 찾는 것만 봐도 품질은 인정할 수 있으나, 중국산 원료에 비해 가격이 높아 현실적으로 국산을 쓰기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고품질 원료를 연구개발해 해외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당위론이지만 영세 업체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내수 거래선을 확보하고 있는 일부 대형 완제사 계열 원료업체 조차도 시도하기 버거운 현실이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정부는 연기는 피우지만, 속시원한 국산 원료의약품 산업 발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진지한 고민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다. 얼마전 식약처가 '원료의약품 등록에 관한 규정 개정'과 관련해 원료의약품제조 및 수입업체 간담회를 하면서 내놓은 자료는 정부가 원료의약품 산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식약처는 원료 대외의존도가 90%에 이른다면서 1985년 대비 2000년 변화를 통계수치로 제시했다. 1985년 55%이던 대외의존도가 2000년 90%가 됐다고 했다.
20년 전 자료를 내놓았다는 것을 과장해 해석하면, 원료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고민도 20년 전에 멈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일본 어느 지차체가 3.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쓴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우리나라에서도 3.5인치 플로피 디스켓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또다른 식약처'는 작년 7월 국산 원료의약품 산업계를 잠깐 행복하게 만들었다. '제네릭 의약품 경쟁력 방안' 중 하나로 국산원료를 사용한 완제의약품에 대해 신속심사를 하겠다는 내용의 인센티브 방안을 내놓았다. 제약산업계와 논의하고 연구용역을 통해 국산 원료의 인정 범위, 세부 인센티브 방안을 이르면 2022년부터 시행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것은 이것 뿐이니 그저 잘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완제 제약산업계에도 한마디 보태고 싶은 것은 일본 제약산업 생태계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재택 근무를 하면서도 도장을 찍기위해 출근하는 '독특한 일본'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원료의약품 산업과 완제의약품 산업을 공존시키는 산업계 문화가 있다. 일본 완제 제약회사들은 국내 완제사들과 다르게 자국산 원료의약품을 우선 사용하는 게 불문율이다. 가격대비 품질 측면에서 '메이드인 코리아 원료의약품'을 대안으로 삼는다.
3.5인치 플로피 디스켓에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우리 산업생태계에는 왜 이처럼 공존의 문화가 없을까 자문하게 한다. 어차피 원료의약품이든, 완제의약품이든 내수로 먹고 살 수 없는 우리 환경이지만, 내수에서 최소한의 허기는 채워야 바깥을 도모할 수 있다. 원료산업 육성에 관한 정부의 대책 마련과 함께 가치사슬을 만들어가려는 완제 제약회사들의 관점 전환도 필요한 상황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했으니 원료제조사들의 노력도 함께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원료수입업체, 제약회사 모두 근무해보았습니다만 중국,인도산 원료의 가성비,경쟁력이 큰 것은 사실이더라고요. 한국산 원료의약품을 일본 제약사들이 선호하는 점도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