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게임, 신뢰의 게임이 필요한 전통제약산업군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국내 전통제약산업계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너나없이 '사슴사냥 게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덩치 큰 사슴들이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는데도 사슴(stag)은 외면한 채 익숙한 토끼(rabbit) 사냥에 몰두하는 소박한 모습들 말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등장한 우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슴사냥 게임의 내용은 단순한 듯 복잡하다. 예를들어, 사슴사냥을 하려면 두 명의 사냥군이 협력해야하지만, 토끼사냥은 한 명의 사냥꾼으로 가능하다.
상상할 수 있듯이 사슴 사냥으로 얻는 이익은 둘이 나눈다해도 토끼사냥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사냥꾼들의 비즈니스에도 비극적 요소가 숨어 있다. 사슴사냥을 위해 두 사냥꾼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눈 앞으로 토끼가 지나가는 순간이다.
사슴사냥 게임은 그래서 확신게임이자, 신뢰게임이라고도 한다. 중간 경우의 수와 이익 분배 과정을 생략하고 요약하면 사슴사냥게임은 협력을 약속한 사냥꾼이 배반하면, 나도 배반해 사슴대신 토끼를 쫓는 것이 이득이 된다. 둘 다 협력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큰 이득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최근 전통 제약회사들의 시선은 아토젯 후발약물 경쟁에 쏠려있는 데 이는 얼핏 '사슴사냥을 위한 협력의 룰 마련' 같기도 하고, 이미 손아귀에 준 포획물을 선착순에 따라 분배하는 의식같기도 하다. 아토젯 후발약물이 사슴인지 토끼인지는 각자 마음에 달려 있을 터다.
아토젯 후발약물이 미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협력의 룰 제정 과정이라면 임상재평가를 통해 기 적응증을 입증해 생존시키려는 콜린알포세레이트 공동임상 멤버 모집은 아련한 이익 보전 가능성과 함께 리스크를 분담하려는 절차로 다가온다.

대략 전통제약 산업군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이상적이지만 도전적인 아젠다를 전통제약회사들에게 던졌다. 100년 내공으로 다져놓은 기술과 자본과 인력을 모아 블록버스터(연매출 1조원 이상 의약품)를 글로벌에서 터트려보자는 것이다.
협력을 통해 잡아야할 사냥감(사슴)으로 블록버스터를 내세운 것인데, 여건은 꽤 좋은 편이다. 바이오헬스, 시스템 반도체, 미래차를 혁신성장 BIG3 산업으로 규정한 정부가 2022년 바이오헬스 수출액 200억 달러 달성과 바이오헬스 세계시장 점유율 3%를 목표로 R&D 지원 및 전문인력 양성을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각기 플랫폼 기술이나 쓸만한 신약 파이프라인에 몰입해 개발중인 국내 바이오벤처가 적지 않다. 자본이 계속해 바이오산업으로 몰리며, 신약개발과 관련한 기술수출을 전통제약회사들도 꽤 된다는 측면에서 '이젠 블록버스터에 도전해 볼 때'다.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해졌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와 56개 제약바이오업체가 총 70억5000만원을 출자해 만든 한국혁신의약품컨소시엄(KIMCo)의 경우 현재 보건복지부 '코로나 치료제 백신 생산 장비 구축 지원사업'과 중소벤처기업부의 '의약품 업종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는 전통제약회사 간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물이 들어오는데 지금까지 전통제약회사들이 타고 있는 배는 규모도 작고, 당연히 돛도 지나치게 작아 순풍을 놓치고 있다. 전통제약사들은 이 배에 의지해 선진제약강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어렵다. 당연히 새 판이 필요하다. 고만고만한 틀에서 놀것이 아니라 더 큰틀에서 손해를 최소화하며 미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다.
코로나 19상황에 비친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의 기틀은 본격적인 기술수출의 해인 2015년을 기점으로 한층 더 튼튼해진 것은 사실이다. 코로나 백신개발은 결국 신약 선진국에 놓쳤지만, 그 백신 생산을 담당할 체력이 갖춰져 있고, 비록 속도는 늦지만 국내기업들도 추격전을 펼치고 있다. 미래 백신 개발 경쟁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라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가하면 항체치료제를 거의 다 개발했다는 기업도 나왔다.
"아이쿠, 다 오셨습니다." 산 정상으로 이어진 오르막 길을 숨가쁘게 오르다보면 하산객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다왔다"고 말해주곤 한다. 옮겨야할 발걸음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격려에서 다시한번 정상을 향한 희망을 품게된다. 한발 한발 내디뎌 7부 능선, 아니 8부 능선에 오른 등산객처럼 전통제약회사들도 이쯤은 와 있다. 자, 이제 사슴사냥을 시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