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기술 발전으로 의약품 시장 세분화
여재천 국장 "속도보다는 우선순위 고려해야"

"샌프란시스코에 가시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달아요." 미국 싱어송라이터 스콧 매켄지(Scott McKenzie)의 샌프란시스코라는 곡의 가사다. 히피 문화가 만연했던 1967년, 가난한 뮤지션이었던 스콧은 이 곡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인기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샌프란시스코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콧은 2010년 길랑 바레 증후군(GBS)이라는 희귀병을 앓게 된다. 급성 마비성 질환이었다. 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73세의 나이로 LA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희귀질환은 7000여종이 보고됐으며 환자 수는 3억5000만명에 이른다. FDA는 500여종이 넘는 희귀의약품을 승인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희귀질환의 95%는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다. 환우 대부분은 본인 질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망하거나 평생을 고통받는다.
이와 관련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여재천 사무국장은 23일 오전 영등포 당산동 소재 조합 대회의실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에는 알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알츠하이머치매 또한 옛날에는 왜 죽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계속해서 연구개발과 분석을 거듭하다보니 결국 '언멧 메디컬 니즈(Unmet Medical Needs)'가 명확해졌다"고 했다.
'언멧 메디컬 니즈'는 강한 수요가 있는데도 유효한 치료법이 없어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미충족 의료 수요다. 언멧 메디컬 니즈는 첨단바이오기술 발전과 함께 발을 맞춰왔는데, 희귀질환이 점차 세분화되면서 희귀의약품도 높은 비율로 계속 증가하게 됐다.
미국 FDA 의약품평가연구센터(CDER)는 최근 5년간 연평균 43개 신약을 승인했다. 이중 희귀의약품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2018년에만 59개 신약을 승인했고 이 중 43개(73%)가 한 개나 그 이상의 신속허가 프로그램으로 승인됐다.
첨단바이오의약품은 규제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환우들이 요구하는 희귀의약품이 현 보건의료체계에서 잘 작동되려면, 완화가 아닌 더욱 확실히 규제하는 신속허가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신속심사·조건부허가·우선심사 대상의 신약을 지정하는 신속허가 프로그램은 2018년 등장했다. 2018년 기준 신속심사로 지정된 신약은 24개·혁신 치료제로 지정된 신약은 14개다.
아울러 미국 NIH(국립보건원)는 2015년 12월 전략계획(NIH-Wide Strategic Plan 2016~2020)을 발표해 희귀질환 연구 기회 확대를 위한 우선순위 설정 혁신을 촉진하고, 우수한 의과학 연구자를 선발·유지키로 했다.
여 국장은 "시대가 바뀌었으면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짚신이 안 팔리고 신발이 팔리는데 짚신을 만들면 안 된다. 국립보건원도 우선순위를 바꿔서 혁신을 촉진했다. 중개연구와 기초연구를 더 강화하고 연구기회를 증대시켜 우선순위를 바꿨다. 희귀질환이 늘어나면서 언멧 메디컬 니즈도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NIH·FDA의 유전자 치료제 규제도 변화했다. 두 기관장은 유전자 치료제를 다른 의약품과 동일한 수준으로 규제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지난 40년간 유전자 치료제 임상시험 시 추가적으로 특별 관리감독을 위해 운영됐던 RAC(재조합 DNA 자문위원회) 역할은 유전체 편집·합성생물학 등 신생 생명공학 분야 자문 역할로 조정됐다.
여 국장은 "유전자·줄기세포 치료제를 빨리 해주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언멧 메디컬 니즈에서 타당성이 있는지를 고려해 규제가 변화하는 것이다. 완화하는 게 아니다. 더욱더 '선순환 규제'로 강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미국과 일본은 희귀질환 연구개발이 구조화된 상태다. 미국의 경우 FDA·NIH 등 정부기관 연동을 통한 단계별 임상·중계연구에 집중하며 여러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공식 기관이 아닌 민간 중심으로 희귀질환 신약 연구개발이 이뤄졌다. 그런데 최근 일본·중국 등 여러 국가에서 큰 변화가 발생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 하에 희귀·난치병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다.
여 국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식약처가 이런 틀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지만, 복지부와 충분한 협의 하에 환우 중심의 언멧 메디컬 니즈를 충족시키는 규제와 연구개발 지원 인프라를 구축했는지는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이제 신약 개발은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환우 중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현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건강보험 재정은 선순환적으로 흐르므로, 이제는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해당 신약이 시장을 얼마나 점유하며 이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지에 대한 관점을 버려야 한다. 신약을 개발하면 당연히 부와 명예는 따르게 돼 있다. 또, 시대가 바뀌었다. 미국은 빅데이터와 AI를 응용해 신약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100만 데이터를 얘기하는데, 일본은 10분의1인 10만 데이터를 얘기하면서 이 데이터만이라도 신약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빅데이터 센터를 구축했다"고 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첨단바이오의약품 개발 기술이 발전하면서 희귀의약품 개발을 위한 규제·정책을 뒷받침하는 인프라를 발전시키고 있다.
여 국장은 "보건당국이 그에 대한 철학이 부족한 게 아니냐. 식약처가 방향성에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냐. 식약처만의 독립성이 없는게 아니냐. 보건당국은 좀 더 전방위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우리나라는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을 얘기하기에 앞서 우선순위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