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의 곧이곧대로 [11]
100여일 넘긴 진료공백, 사회적 합의 찾을 때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 발표와 이에 맞선 전공의 및 의대교수 집단행동으로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한 지 100일을 넘겼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단어나 문구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100여일의 장기간 진료 공백 및 차질 사태에 대해 의사협회·전공의협의회·전국의대교수비대위 등 의사단체 관계자는 약속이나 한 듯 ‘의료대란’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반해 정부 관계자는 “의료현장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의료현장에 큰 혼란은 아직 없다. 중증 응급환자 중심으로 차질 없이 운영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가 주장하는 의료대란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고, 비상진료체계 운영을 통해 환자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의료공백 겪은 환자들, 피해 입으면서도 현실 적응 중
의료현장에서 지난 100여일 동안 치료받았던 환자 입장에서는 현 사태에 대한 의료계와 정부의 진단은 모두 틀렸다. 수련병원에서 약 9000여명의 전공의가 사직하고 의료현장을 떠났다. 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대병원·신촌세브란스병원·서울성모병원을 일컫는 소위, ‘서울Big5병원’에서는 더 이상 신규 환자를 받지 않고, 입원환자도 약 30~40% 줄였다. 서울Big5병원 이외 전국의 상급종합병원에서도 입원환자를 약 10~20% 감축했다. 전국의대교수비대위 소속 20개 대학병원에서는 매주 하루씩 외래진료와 비중증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발표도 했다.
이러한 사태가 100일간 지속되었으니 의사 입장에서는 의료인력이 대폭 줄었으니까 의료대란이 분명히 맞다. 그러나 국민과 환자가 생각하는 의료대란이란 의료인력 부족으로 환자안전사고와 의료사고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발생해 환자들이 죽어 나가고, 신문방송에 사망 사건이 대서특필 되고, 유족은 법적 대응과 1인시위·집회·기자회견을 하는 상황을 뜻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지난 100일간 우리나라 대부분의 환자는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이용에 불편을 겪었고, 피해까지 보았다. 질환 치료에 필수적인 검사·항암치료·방사선치료·수술·장기이식이 연기되었고, 그 기간 중증질환이 재발하거나 악화돼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진 환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환자들이 치료받다가 사망하면 몇 달 후부터는 이들 유족의 법적 대응이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환자 곁을 떠난 전공의는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남아 환자 곁을 지킨 전문의와 의대교수만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난센스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어쨌든 환자와 국민이 상상했던 의료대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판단한 “큰 혼란 없이 운영 중”은 더더욱 아니다. 환자가 어금니 꽉 깨물고 견디며 환자 가족과 함께 현재의 의료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해 차선책으로 치료 병원과 방법을 선택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했기 때문에 의료대란을 막은 것이다.
그동안 법적 근거가 없어서 불법 논란이 있었던 진료지원간호사(일명, PA간호사)를 정부가 시범사업 형태로 전공의가 했던 업무 일부를 대신하도록 한 것도 의료대란을 막는 데 한몫 했다. 여러 번 사직하겠다며 대국민 발표까지 했던 의대교수와 전문의가 실제로는 대부분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특히, 의대교수와 전문의들이 진료지원간호사라도 법적으로 의사가 아니면 절대 대신할 수 있는 검사, 시술, 수술 동의 등 전공의가 그동안 했던 역할의 빈공간을 채웠기 때문에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100여일 견딘 환자는, 각자도생 방법으로, 합리적 투병
지난 100여일 동안 서울Big5병원에서 신규 중증환자를 받지 않고, 장기간의 의료공백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규로 발병한 중증환자는 예전처럼 서울Big5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지역의 상급종합병원을 선택해 치료받고 있다. 신규 중증환자 입장에서는 현재 상황에서의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 지역의 상급종합병원을 선택해 치료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울Big5병원에 가야만 검사나 치료가 가능한 신규 중증환자와 희귀난치성질환이다. 이들의 치료받는 길이 막혀 있다. 특히, 더 이상의 치료방법이 없는 말기 암환자는 임상시험에 참여해야만 생명을 살리거나 연장할 수 있는데, 임상시험을 가장 많이 시행하고 있는 서울Big5병원에 갈 수 없어 벼랑 끝에서 절망하고 있다.
의료계와 정부가 아직도 내년도 의대정원 증원 규모를 갖고 강대강 대치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난 100일간 계속된 의료공백 장기화 사태로 인한 의료현장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한 의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의료공백 사태가 길어질수록 환자 피해도 늘어나지만 이에 비례해 환자도 합리적 판단을 통해 의료현장에 적응할 것이고, 더 나아가 환자를 중심에 둔 미래 의료환경에 대한 요구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응급, 중증외상, 중증소아, 분만, 흉부외과 등과 같이 의료사고 위험이 높고, 당직이 많아 근무 여건이 힘들고, 개원의보다 수익이 상대적으로 적은 ‘기피과 필수중증의료’를 의사 뿐만 아니라 환자를 위해서도 ‘선호과 필수중증의료’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계와 정부 그리고 국민과 환자 모두 조금씩 양보해야 하고, 이렇게 마련된 여러 차선택 중에서 가장 좋은 차선책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선택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