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쉼표 |
모던민화 그리는 전은정 피알봄 대표
시작은 단순했다. 집과 회사를 벗어난 제3지대에서 '진짜 나'를 찾고 싶다는 각성. '정말 시작해도 될까?' 고민이 깊어지던 중 의식의 흐름이 이끈 SNS 공간에서 서하나 작가의 '모던(Modern)민화'를 처음 만났다.
고요하고 독특한 색의 향연이 뜻하지 않은 해방감을 준다는 걸 전은정 피알봄 대표 는 그 때 알았다. 모든 일이 한 번에, 쉽게 끝나지 않는 것처럼 반복하고 덧입히는 민화의 여정은 인생을 닮아있다. "처음 칠할 때는 예 쁘지 않거든요. 낙엽 한 장, 꽃잎 하나를 그릴 때도 한 번, 두 번, 세 번... 색을 덧입히는 과정을 수개월씩 반복하며 상(象)을 잡아나가요. 하루하루 색을 더할수록 소재의 입체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저만의 세상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게 민화의 매력이죠."

민화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과 소망, 해학을 비춘다. 정형화된 소재와 색채를 중시하는 전통민화와 달리 작가의 현대적 해석과 변주를 허용하는 '모던민화'의 개방성은 전 대표의 창작열을 더욱 자극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거슬러 고착된 사물의 겉모습을 내면의 색으로 치환하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안목도 달라졌다. 전 대표는 "막 떨어져 아무도 밟지 않은 남산의 낙엽 색깔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멀리서 보면 단편적인 나뭇잎 색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갈래로 나뉘고, 꽃잎 한 장에도 두세 가지 색깔이 스며 있다"며 "평소 지나쳤던 일상과 여행지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작품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 모던민화에 발을 들인 후 전 대표의 토요일 아침은 완전히 달라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전후로 크고 작은 휴식기가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씩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일년 이상이 걸리는 고된 작업이지만 '몰입'이 주는 쾌감이 컸다. 그는 "어떤 이는 음악으로, 누군가는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나는 다양한 색감을 발견할 때 에너지를 받는다"며 "그리기에 열중하며 무념무상으로 빠져드는 '완전한 몰입'을 통해 잡생각을 떨쳤다"고 말했다.

'토요 클래스' 구성원들과 호흡도 잘 맞았다. 서로의 작품 세계와 삶의 방식을 응원하는 관계에 누구 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지난 봄에는 여덟 명의 클래스 동지들과 첫 전시를 여는 성과도 있었다. 전 대표는 "바쁜 일상과 업무에 쫓기면서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모두들 마치 '초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며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동료들과 끈끈한 교감 덕분에 압박감을 이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첫 전시에 출품할 작품으로 그는 '가을리스'(2020), '모란도'(2021), 그리고 '다알리아'(2025)를 골랐다.
전시장을 찾은 일반 관람객이 작품을 구매하는 뜻밖의 경험을 하며 "내 그림을 누군가 샀다는 사실보다 작품을 통해 나를 전혀 모르는 타인과도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새로웠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물과 자연에 깃든 상서로움을 알게 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다. 복숭아, 석류, 포도와 같은 과실은 '다산, 풍요, 결실'을 뜻하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번영, 장수, 권위'를, 힘찬 물결은 '활력과 재물'을 부르는 상징으로 통한다.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과 행복,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과 정성을 화폭에 담는다.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과 행복,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과 정성을 화폭에 담는다
전 대표도 올해 초, 입시를 앞둔 자녀에게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직접 그려 선물했다. 배산(背山)의 다섯 봉우리, 달과 태양, 푸른 소나무와 물결이 어우러진 그림에서 마음의 평안과 성취를 얻길 바랐던 '엄마의 기도'를 그림에 담았다.
"전통적인 단청색이 어우러진 일월오봉도를 밝고 희망찬 봄·여름 감각으로 바꿔 아이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짙은 초록과 흑갈색이 돋보이는 원작의 컬러를 민트색 하늘과 연두색 산봉우리, 청초한 물결로 대체한 엄마의 그림을 딸은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책상에 두고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는 감상평에 한편 안도하면서 대신해줄 수 없는 '딸의 시간'을 묵묵히 응원했다는 그는 인터뷰 도중 자녀의 대학 합격을 축하하는 전화를 받았다. 결과를 묻지 않았던 '엄마의 기다림'을 기자도 조용히 응원한 순간이었다.
새해에 그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볼 작정이다. 헌신으로 점철돼 어쩌면 가슴 아픈, 이제는 가족의 역사가 된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려면 생각보다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 다시 만난 단짝 친구들에게 어울리는 그림도 구상 중이다. 그는 "아직 모자란 실력이지만 그림으로 사랑하는 지인들을 응원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큰 위안이 된다"며 "그림을 전하는 진심을 알아주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 덕분에 마음이 풍요롭고, 그림을 통해 타인과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이 즐겁다"고 말했다.

뒤늦게 배운 민화가 언젠가 다가올 '인생 2막'을 채워줄 독창적인 무기가 되기를 전 대표는 바라고 있다. 벌써 6년을 지나고 있는 민화 여정이 '중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자평한 그는 아직도 "그릴수록 더 그리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민화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말했다.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날 '제3지대'를 찾으면서도 행동을 주저하는 이들에게는 "일단 해보라"며 "안될 것 같은 무모한 도전이 눈코뜰새 없는 삶속에 묵혀뒀던 나, 몰랐던 나를 찾아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