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한국인] 김은미 WHO 약물감시 기술전문관
의약품 안전성은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교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치료제들이 세계로 뻗어나가 다양한 인종과 국가별 환자 안전에 영향을 준다. 코로나19 팬데믹 후 백신을 포함한 의약품 공급은 국가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약물감시(Pharmaco-Vigilance)는 시판된 의약품의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추적관찰해 부작용 등 안전 문제가 발견되면 허가사항을 변경하거나 판매를 중단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하는 활동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를 '의약품 사용과 관련된 이상반응 또는 여타 의약품 관련 문제를 발견·평가·이해·예방하는 과학 및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히트뉴스>는 WHO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김은미 약물감시 기술전문관(PV Technical Officer)을 만나 역동적인 글로벌 의약품 정책 동향을 들었다.

김은미 전문관은 WHO 제네바 본부에서 의약품 안전성과 관련된 규제과학 및 공중보건 문제 발생 시 각국 규제기관, 지역사무소와 빠르게 소통해 지침을 제·개정거나 규제 조화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공중보건 위기 발생 시 각국 보고자료를 토대로 치료제 및 백신 공급 및 안전성 모니터링에 관여하기도 한다.
국제적으로 의약품 현안은 증가하지만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국제협력 전문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의·약학 전문성을 바탕으로 규제·역학·데이터 과학을 활용하는 융합형 인재가 필요하지만 인력 공백이 크다"고 김 전문관은 말한다.
약사 출신인 그는 동덕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와 제약회사 수출 업무를 담당하면서 산업계에 입문했다. 지금처럼 디지털 기술과 지원 도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세계 각국의 정책 동향과 규제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주말과 개인 연차를 쪼개 자비로 국제학회에 참가하고 업계 동료들과 실무 스터디그룹을 꾸려 해외 정보를 수집했다.
부족한 영어는 자발적 퍼블릭 스피치 훈련으로, 다국가 글로벌 네트워크는 대한약사회 국제협력위원회 활동으로 보강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환자 안전의 중요성에 눈을 뜬 그는 국제기구 활동을 통해 국경 없는 의약품 안전과 보건 안보 현안에 맞서고 있다.
김은미 전문관과 일문일답을 통해 글로벌 의약품 안전관리 체계와 작동 방식, 국제협력 전문가의 역할을 알아봤다.
지금까지 몇 개국을 방문했나.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미주 등 수십 개국을 다녔다. 업무 특성상 각국 식약청이나 보건부를 방문해 규제·거버넌스·약물감시 체계 구축을 지원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업무 출장으로 한 번에 3주 이상 여러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의약품 분야 국제 업무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나.
"제약회사와 제약협회에서 국제협력업무를 맡으면서 FTA를 담당했고, 그 때 수출용 인허가·규제, 특히 미국·유럽 등 주요국 규제에 대한 지식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당시 관련 자료와 교육이 거의 없었다.
전국 제약사에 공문을 보내 해외 규제 담당자를 추천받아 약 20명 규모의 스터디 그룹을 꾸렸다. 2주에 한 번 협회 회의실에 모여 수백만 원짜리 시험 대비서를 함께 공부하고, 영어 원문을 해석해 가며 글로벌 규제 동향을 공유했습니다. 스터디 그룹에 참가한 여러 명이 미국 RAPS(Regulatory Affairs Professionals Society)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 경험이 커리어를 국제 업무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과 같은 비대면 회의나 언어 지원 환경이 없었을 때 어떻게 최신 정보를 확보했나.
"세계약학연맹(FIP)이나 WHO 세계보건총회 같은 국제회의에 자비로 참석해 각국 약사·보건정책 전문가와 직접 만나 이해를 높이고 자료를 찾아봤다. 돌아오면 현장에서 얻은 정책 자료와 해외 사례를 번역해 뉴스레터 등을 통해 국내 약사사회에 공유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방대한 분량은 업계 동료 약사·연구원들과 '번역팀'을 꾸려 함께 작업했고, 국내외 바이오·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던 멤버들이 참여해 뉴스레터 형태로 배포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해외 약사서비스, 중증질환 관리 정책, 제도 개선 경험 등을 한국어로 소개했다."
언어 장벽도 상당했을 것 같다.
"영어는 그 때도 지금도 항상 공부한다. 약대 졸업 직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면서 기초를 다졌고 취업 후 다국적 제약회사와 국제 프로젝트를 통해 실무 영어를 익혔다. 그래도 회화와 발표 능력은 별도의 노력이 필요했다. 프리토킹 모임과 퍼블릭 스피치 클럽에 매주 2~3회씩 꾸준히 참여하며 토론과 발표 훈련을 했다.
유학 시절 하버드대학에서 보건 정책과 환자 안전 과목을 수강하면서 영어 토론·발표에 적극 참여했다. 이런 경험들이 국제기관에서 일할 때 큰 힘이 됐다. 언어는 장벽이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WHO에는 언제, 어떻게 가게 됐나.
"미국에서 보건정책을 공부하던 중 인턴십 과제를 위해 WHO에 지원했다. 당시 환자 안전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이 커 WHO 제네바 본부 환자안전(Patient Safety) 부서에서 의료사고 예방 가이드라인 개발 관련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당시 WHO에서 개발한 손씻기 실천에 관한 글로벌 서베이 설계와 보고서 작성 등을 주도했는데, 이를 계기로 WHO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인턴십 후 미국 NGO 일원으로 미국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국제 보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각국 식약청의 거버넌스·약물감시 체계 구축을 지원하는 업무에 참여했다. 당시 일했던 NGO가 주로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의약품 시스템 강화 사업을 수행하던 곳이어서 WHO, 미국약전(USP) 미국식품의약국(FDA) 등 다양한 기관과 협력했다.
이후 WHO 아프리카 지역사무소에서 백신 안전성 전문가로 활동하며 아프리카 백신안전성위원회 설립·운영과 다국가 규제·허가·이상사례 대응 역량 강화를 지원했다. 현장 경험을 살려 WHO 제네바 본부 약물감시(PV) 분야 기술전문관으로 채용돼 활동 중이다."
현재 어떤 업무를 맡고 있나.
"WHO 제네바 본부에서 약물감시(PV) 분야 기술전문관으로 근무하며, 각국 규제기관과 WHO 지역사무소를 연결해 공중보건 위기 대응을 지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세계 각국에서 보고된 백신 및 치료제 이상사례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안전 조치가 필요한 사항을 모니터링하고 규제기관들과 함께 대응 전략을 마련했다. 아프리카 지역사무소 근무 경험을 살려 백신안전성전문가위원회를 지원했으며, 국가별 국가별 약물감시센터 운영과 이상사례 보고 역량 강화 등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 각국 보건 문제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프리카에서 보건 규제 체계를 처음부터 설계·구축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언어·문화·행정 절차가 모두 다른 환경에서 복지부 장관, 식약청장 등 고위 관계자를 직접 설득하며 제도 개선을 유도해야 했다. 예를 들어 르완다에서는 약물감시센터 설립을 위해 조직 구조와 실행 계획을 제시하고, 이해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합의를 조율했다. 당시 인력과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몇 년 뒤 방문했을 때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항공편이 줄줄이 중단된 상황에서 긴박하게 귀환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각국 대사관이 전세기를 띄우거나 군 수송기를 운영해 자국민을 송환하는 상황에서 나 역시 귀국편을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 현지에서 협력하던 민주콩고 한국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귀국 항공편에 합류할 수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평소 구축한 네트워크와 신뢰 관계가 안전,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글로벌 규제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소양이 필요한가.
"의·약학 지식을 기반으로 규제과학, 역학, 데이터 분석을 융합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론만이 아니라, 국가별 보건 규제 현장에서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실무 경험이 요구된다. 특히 국제기구나 다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기적으로 유지·관리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국제협력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도전하는 종사자들에게 조언한다면.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 국제 무대는 단발성 참여로는 신뢰를 얻기 어려운 분야로, 지속적인 활동과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언어 능력, 전문성, 네트워크를 동시에 준비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문제를 해결한 경험을 쌓아야한다. 현장 경험은 책이나 보고서로 배울 수 없는 통찰을 준다. 가능한 다양한 국가와 업무 환경에 직접 부딪혀 보길 권한다.
다양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오해를 극복하려면, 나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