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량권 일탈 남용 금지 원칙에서 판가름
원고, 학회 및 의대교수들 의견서 제출해 급여적정성 피력

행정청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은 보통 피고(행정청)의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싸움이지만, 의외로 원고의 공격이 딱 하나만 들어가면 원고가 이길 수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에 유행하던 아케이드 게임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세기말의 학교 앞 문방구나 오락실에는 항상 모험을 떠난 주인공이 '끝판왕'을 깨러 가는 게임들이 있었다. 끝판왕은 말 그대로 엄청난 맷집과 공격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깨기가 어려웠지만, 대신 주인공은 보통 목숨이 몇 개씩 있었다. 이 목숨 저 목숨이 닳아도, 다 닳기 전에만 보스에게 필살기를 적중시키면 이길 수 있었다.

행정소송도 마찬가지다. 처분을 내리는 상대방은 법령ㆍ조직ㆍ권한 등 민간에서는 전혀 갖기 힘든 강력한 힘들을 갖고 있지만, 그에 맞서는 원고는 절차적 위법성이든, 신뢰원칙 위반이든, 법령 해석의 착오든, 재량권 일탈 남용이든 뭐든 다 던져보고 딱 하나만 맞으면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은 그 적법성을 피고가 입증해야 하는데(대법원 1984. 7. 24. 선고 84누124 판결 등), 적법성이란 곧 어떠한 위법 사유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7일에 선고된 빌베리건조엑스제의 급여목록 삭제처분 취소처분에 대한 행정법원의 판결 역시 크게는 이러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상 행정소송에서 약가 인하 처분이나 급여목록 삭제 처분을 다투는 제약사들은 정형화돼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몇 가지의 공격(소송법적인 용어로는 '청구 원인'이라고 한다)을 던져놓는다. '처분에 이르는 평가, 검토, 의견제시 절차가 급박하고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상한금액이나 급여대상 여부를 조정하는 요양급여 규칙의 근거조항은 법률(국민건강보험법)의 위임범위를 벗어나 있다', '리베이트 약가 인하의 인하율 산정 근거를 특정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되어 실효되었다' 등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송의 원인을 불문하고 따라붙는 주장이 하나 더 있다. '이 처분 너무한다!!!(라고 쓰고 재량권 일탈 남용 금지 원칙을 위반하였다라고 읽는다)'

10월 27일에 선고된 판결은 바로 위의 마지막 공격이 들어갔다. 고도로 정교한 법리만을 다툴 듯한 행정법원의 재판정에 하소연과 같은 '너무한다'가 웬 말이냐 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재량권 일탈 남용 금지 원칙은 행정법 체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법 원리로 인정되고 있다.

결국 재판이란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며, 사람 사이의 갈등은 칼로 무 자르듯 자르기보다는 상당 부분 상식과 사정, 이해에 기초해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이 민간과 국가의 갈등으로 바뀌는 행정소송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처분의 가혹함, 처분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공익이 사익보다 큰 것인지, 사회통념상 관계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처분의 내용인지 등과 같은 사정이 바로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된다(대법원 1989. 4. 25.선고 88누 3079 판결 등).

처분의 내용이 제약회사가 팔고 있는 약제를 일방적으로 공보험 제도에서 퇴출시키겠다는 것이라면, 당초 결정한 약가나 요양급여 대상 여부가 불합리하였다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이 정한 재평가 절차 및 조정 사유 등에 비춰 수긍할 수 있는 합리성과 사회통념상의 타당성이 있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으로서 위법하게 되는 것이다(대법원 2013. 8. 22.선고 2011두3142 판결).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다수의 전문가 의견을 현출시킨 원고 측의 소송 전략은 매우 좋았다고 보인다. 위 판결에서 원고 측은 다수의 학회 및 의대 교수들의 의견서를 제출해 빌베리건조엑스제의 급여 적정성을 재판부에 피력했다. 법원은 갈등에 대한 판단을 내릴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법률 외의 전문적인 쟁점에 관해 현장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관념적인 주장과 증거만으로 첨예하기 대립하고 있는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의견이 전달됐다면 법원도 처분이 너무하다라는 인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겠다고 보인다. '전문가들과 약을 쓰는 의사들도 여전히 쓸 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SCIE-RCT 임상문헌이 아니면 다른 문헌들은 근거자료도 될 수 없다고 평가해버리고 임상적 유용성 평가 기준을 강화해 판단한 것은 너무하는군!'이라는 판단이 얼마든지 가능했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급여를 삭제해 버리는 처분은 상한금액을 인하하는 처분보다 원고 측에게 더 가혹할 수 밖에 없어서 재량권 일탈 남용을 주장하기가 보다 용이한 측면도 고려 대상이 됐을 수 있다.

다만 재량권 일탈 남용 금지 원칙의 위반 여부에 관한 판단은 비교적 다른 쟁점보다는 재판부의 성향을 탈 수 있다. 실제로 동일한 성분의 약제에 대한 다른 처분 취소소송의 재판부(2023.05.15선고)는 오히려 '건강보험제도 하에서 복지부 장관은 한정된 재원으로 효율적인 급여를 실시해야 하고 의료 환경의 발전에 신속ㆍ적절하게 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사건 처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약사는 일반의약품으로 약을 판매할 수 있고, 임상적 유용성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이라는 공익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라고 하여 재량권을 일탈하거나 남용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두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조군이 되었던 재판은 1심에서 피고가 승소한 뒤 원고가 항소하지 아니하여 바로 확정된 상태이다. 보건복지부는 처분행정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항소하겠지만, 당분간은 동일한 성분의 약제가 급여의약품과 비급여의약품으로 동시에 팔리는 상황을 목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원고 측에서는 항소심이 진행되어도 당연히 집행정지 신청을 제기할 것이고, 1심에서 승소 판결을 얻어낸 이상 2심에서 집행정지가 인용되지 않을 가능성도 극히 낮을 것으로 보인다.

종국적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지만, 최종적으로 승소한다면 원고들 입장에서는 국가의 칼을 빌려 경쟁자를 제거한 셈이니(차도살인지계) 처분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다. 한편 이후로는 약가 인하가 아닌 급여삭제 처분의 경우라면 전문가 의견의 활용 폭이 더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다른 빌베리건조엑스제 소송을 진행하는 제약사들은 이 건 승소 판결을 유의미한 참고자료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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