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 취중잡담|
김선진 플랫바이오 대표

"너는 큰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
서울의대 학장을 지낸 아버지는 막 서울의대 합격 통지를 받은 아들에게 이런 숙제를 줬다. 공부보다 월담도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한 소년은 문과, 이과 중 어디를 갈 것이냐는 질문에 '비뇨기과'를 가겠다고 답하던 괴짜였다. 고등학교 1학년 성적은 서울에 있는 대학조차 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고3 시절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모두 재수를 하게 됐을 때, 홀로 서울대의대를 합격했다. 고1 담임선생님은 '이제 서울의대도 타락했구나'라며 장난스런 축하를 해 주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했던 마음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고, 평탄한 인생보다 자신 앞에 놓인 어려운 상황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 좋다는 멘탈갑. 그는 김선진 플랫바이오 대표다. 자신이 말한 내용이 인터뷰 기사가 되겠느냐는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은 인생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대표님 뵈면, 얼굴에 장난기가 보여요. 학창시절, 어떠셨나요?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정말 원없이 놀면서 공부했어요. 당시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은 모두 재수를 했는데, 나만 서울의대에 붙었죠. 속죄(?)하는 심정으로 다음 해에 친구들 재수 원서접수까지 따라 다녔어요.(웃음) 가장 편한 친구들이고 제가 어려웠던 순간에 늘 그 친구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형제같이 어울리고 있지요.
사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 까지 그렇게 성적이 좋지 못 했어요. 담임 선생님이 대학 못 간다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당시 교감 선생님의 애정 어린 관심과 격려가 없었다면 아마 대학도 가지 못 했을 거에요. 감사한 분이죠."
서울의대를 나와 연구자의 길을 가셨어요.
"아버지가 내신 숙제였어요. 제가 의과대학에 진학할 당시부터 '너는 큰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죠. 아버지는 직접 군인으로서 한국전쟁을 겪은 뒤, 1953년도에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수련을 받고, 이후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시다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한국의 비뇨기과를 자리잡게 하는데 일조를 하셨거든요. 아마 느끼시는 바가 많으셨던 것 같아요. 늘 마음 속 깊숙이 큰 무대에 선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향한 첫 무대가 일본 동경 국립암연구소 였어요."
그래서 일본 유학생활은 어땠나요?
"갑자기 유학길에 올랐으니,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일본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 하고, 분자종양학 연구실에 가게 된 거에요. 1992년인데, 당시 전 DNA의 염기서열 5’과 3’의 개념조차 모르고 연구실에 가게 된 거에요. 물론 일본어도 당최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요.
이메일도 없던 때라, 아버지에게 다급하게 팩스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현대일본어교본'을 보내주셨어요. 정말 그 당시는 연구실 저널 컨퍼런스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 했어요.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죠.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독으로 일본어 공부와 분자생물학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제가 다 막막한데요.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지, 당시 항체 개념이 막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제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항체에 관한 것이었어요. 당시 논문을 쓰기 위해 직접 슬라이드를 만들면서 실험에 임했죠. 당시 항체에 대한 사업화 움직임 있었고, 시제품을 생산하고 테스트해야 하는 의뢰가 실험실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당시 실험실에 항체를 다뤄 본 사람이 없었고, 제가 주도적으로 연구를 했죠.
유학생활 6개월 정도가 지나니, 지하철에서 일본사람들이 상사 욕을 하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분자종양학에대한 수준이 일취월장하더라고요.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보이기 시작했죠. 처음으로 저널 컨퍼런스에서 질문을 했어요. 당시 실험실 동료들은 제가 항체를 잘 다루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게 '자신들과 수준이 맞지않아서 무시하는건가'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친해지고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 했고 지금도 교류하며 지내고 있죠 (웃음)."
앰디엔더슨 원래 가시려던 계획이셨어요?
"당시 스승이던 일본국립암연구센터 총장 테라다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피들러 박사(Dr.Fidler) 연구실로 가게 됐어요. 재미있는 것은 인생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1992년 유학당시 피들러 박사가 일본 국립암센터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워낙 이 분야 거장이시니 과제에 대한 코멘트를 해 주셨죠. 그 코멘트가 너무 직설적(toxic)하고 무서워, 절대 저런 사람 밑에서 연구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99년에 그 연구실에 가게 된 거죠.(웃음)"
절대 가지 말겠다고 다짐했던 연구실, 살벌했나요?
"처음에 인터루킨-8(IL-8) 연구 중 PCR로 해당 물질의 수용체(receptor)를 검색하는 작업을 했어요. 피들러 박사가 과제로 준 것인데, 이상하게 실험이 재현이 되지 않는 거에요. 자세히 살펴보니, 프라이머 서열(sequence)가 좀 이상했어요. 그동안 IL-8 수용체가 아니라, IL-8의 프라이머로 실험을 해 왔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실험실에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후 풍요와 기회로 가득한 꿈의 무대였습니다."
지난 5월 피들러 박사님이 별세하셨잖아요.
"오늘 날의 제가 있게 해주신 분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심지어 안 되는 것도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죠. 휘하의 제자들을 자신의 아케데믹 키즈(academic kids)라고 부르셨지요. 그분이 유태인이셨는데, 자신은 유태인이 가장 지독한지 알았는데, 저를 보고 한국인이 가장 지독하다고 말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연구했죠.
부부동반으로 여행도 하고 미국을 방문하면 아무리 바쁘셔도 늘 저희 부부를 초대해서 많은 조언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피들러 박사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크립케(Kripke) 박사 역시 매우 훌륭한 분이셨죠. 자외선이 흑색종을 일으킨다는 것을 규명한 면역학의 또 다른 거장이시죠. 두 분을 보며,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을 갖추고 자신이 있으면 너그러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어요. 반면 자신이 없으면,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것을 공격이라고 느낀 다는 것을 두분을 통해 배웠죠."

미국 생활 뒤로하고 한미약품에 오셨었네요.
"이미 올리타로 한국 상황은 어수선했고, 펜탐바디 등 한미가 가진 플랫폼 기술을 (연구자로서) 발전시켜 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미국 문화에 익숙해져 인지, 한국의 큰 조직에 적응하기 쉽진 않았지만요."
그리고 플랫바이오를 창업하셨는데.
"미국에서 배운 연구 역량과 문화에 맞는 기업을 만들고 싶었어요. 미국은 조직원이 하고 싶은대로 용인하고 마음껏 역량을 펼치게 해 준 뒤, 그에 맞는 최적회된 조직의 틀을 만들어 나갑니다. 반면 한국은 만들어진 틀에 사람을 넣으려고 하죠.
구멍가게같이 시작을 했는데 요즘엔 내가 15명의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달 월급날에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최근엔 직원들의 체력단련비도 지급할 정도로 조금씩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어요."
서울대의대, 앰디엔더슨, 한미약품. 걸어오신 길을 보면, 대표님 인생과 '결핍'은 썩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평범한 집안이 아니라서 힘들었어요.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해도 모두 주목하니깐요. 때론 부모님 믿고 행동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한미약품 나오셔서 좀 편히 지내실 수는 없었나요?
"전 이미 누릴만큼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플랫바이오를 창업한 이유도 다음 세대를 위한 것입니다. 항상 우리 회사 조직원에게 열심히 노력해 실력을 갖추라고 강조합니다. 본인만 실력이 있다면,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에게도 너그러워 질 수 있으니깐요.
기회있을 때마다 직원들과 컨퍼런스(conference)도 하고 강의도 해주고 있습니다. 플랫바이오에서 성장한 직원들이 언젠가 제가 물러난 후 계속해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도록, 한국 바이오업계에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을 겁니다."
플랫바이오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으세요?
"국내 바이오 기업은 주변의 여러 환경과 여건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기술보다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좀 있죠. 우리 경영진도 이런 식의 홍보 환경에 고민이 깊을 거에요. 하지만 있는 그대로, 아니 그보다 좀 더 겸손하게 홍보 활동을 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