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면 느리다고, 빠르면 위험한 짓이라며 비판
환자의 요구에 장벽 역할하던 제도 하나씩 개선

강신정 박사의 의약품 허가&등재 [17]  신약 (3)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제작된 '마더 / 안드로이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반란을 일으켜 출산을 앞둔 젊은 커플이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영화의 중간에 한국이 안전하다는 대사가 나왔다. 국내용으로 처리된 자막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끝부분에 갓 출산한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통제되는 안전한 나라였다. 

1962년 미국은 의약품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한 나라였다. 1957년부터 서독 등 42개 국가에서 1만명이 넘는 기형아를 출산하였다. 아무도 원인을 몰라 임부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서독에서 개발한 신약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어느 날 미국은 의약품의 독성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 탈리도마이드를 신약으로 허가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1938년 식품의약품화장품(FDC)법을 근거하여 탈리도마이드의 허가를 거부한 FDA 심사관 Francis O. Kelsey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소비자는 만족하지 않았다. 미래에도 안전하기를 원했다. 의회는 1962년 Kefauver-Harris 수정법을 통과시켰다. 의약품을 허가할 때 안전성을 기존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요구하는 동시에 유효성까지 입증을 강제하는 법이었다. 

Kefauver-Harris 수정법은 의약품의 허가심사에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신약의 안전성 및 유효성을 입증하는 자료에 대한 잣대가 엄격해졌다. 임상시험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신약의 허가 속도는 느려졌다. 임상시험이 시작되고 8년에서 10년 정도 걸려야 겨우 허가될 정도였다. 실제로 1992년 항암제 파클리탁셀 주사제의 경우 임상시험이 시작되고 10년이 지나서 신약으로 허가되었다. 

여론은 양분되었다. 한편에서는 의약품을 허가할 때 안전성과 유효성의 심사가 너무 느슨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의약품의 허가가 불필요할 정도로 느리고, 지나치게 조심스럽다고 비판하였다. 1973년 Sam Peltzman 교수는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였다. 1962년 수정법이 통과된 후 매년 25개의 새로운 약물이 시장에 덜 진입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1 그뿐 아니었다. 신약 개발 비용도 1976년에는 2400만 달러로 증가하여 1960년 초기에 비하면 10~20배로 추산되었다. 2  

FDA의 청장 Alexander Schmidt는 규제기관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신약으로 허가되면 안전성 및 유효성의 문제로 비판하는 청문회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열렸지만, 신약으로 허가되지 않은 품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의회 위원회에서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다. FDA 심사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3

1981년 AIDS 환자가 처음 발생하고, 불과 10년이 지난 후 미국에서만 약 100만 명으로 폭증하였다. HIV에 감염된 AIDS 환자의 치사율은 거의 100%에 달하였다. AIDS 환자와 옹호자들은 FDA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의약품의 허가에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생명을 구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의약품의 허가 과정 전반에 걸친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AIDS 환자의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시키는 약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치료제의 안전성이 충분히 담보되지 않더라도, 심지어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효과가 입증되면 빠르게 시장에 진입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크게 세 가지 범주의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의약품의 개발과 심사에 소요되는 과정을 단축하려는 노력, 둘째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 임상시험에 환자와 지역사회의 참여를 확대하는 노력, 셋째는 FDA에서 정식으로 허가되기 전 유망한 약물의 사용을 확대하려는 노력이었다. 4

1985년 2월 HIV를 감염시킨 동물 세포를 이용한 in vitro 시험에서 azidothymidine(AZT)의 효능을 관찰하였다. 정상 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농도에서 AZT는 HIV-1의 복제를 억제하였다. 그해 6월 15일 임상시험계획서가 제출되자 FDA는 일주일 만에 임상시험을 승인하였다. 5

1985년 6월 282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6개월 예정의 제2상 임상시험이 시작되었다. 16주가 지나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AZT를 유효성분으로 하는 임상시험용 의약품을 복용하는 145명의 시험군에서는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위약을 투여한 137명의 대조군에서는 무려 19명이 사망하였다. 대조군보다 시험군에서 훨씬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더 이상의 임상시험은 비윤리적이라 간주하고 중지하였다. 6

AZT를 환자에게 처방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대조군에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제3상 임상시험의 결과 없이 1987년 3월 20일 FDA는 AZT(Retrovir™)를 신약으로 허가하였다. 임상시험이 시작된 지 불과 20개월 만의 승인이었다. 7  FDA는 신속 허가 이유의 하나로 신약 개발의 초기부터 제약사와 아주 밀접하게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8

그러나 AIDS 치료제로 유일하게 허가된 의약품 AZT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투약 후 1년 정도 지나면서 약효가 떨어졌다. HIV의 내성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대체할 의약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HIV 억제 작용이 있다고 알려진 약물 DDI(didanosine), DDC(dideoxycytidine) 등은 언제 허가될지 알 수 없었다. AIDS 환자는 다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댈러스 바이어스 클럽'라는 영화도 이때를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에이즈 환자인 Ron Woodroof는 FDA에서 승인하지 않은 DDC 등의 약물을 멕시코 등에서 반입하여 AIDS 환자에게 판매하였다. 입소문을 타고 번창하자 FDA는 밀수된 약품을 모두 압수하였다. 

Woodroof는 FDA를 상대로 환자의 자율 처방권을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하지만 패소하였다. 판사는 이렇게 판시하였다. "말기 환자의 경우 FDA에서 승인하지 않은 약이라도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헌법에서는 그럴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9 10
   
AIDS 환자들은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투약받고 싶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행동으로 의사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10월 11일에는 1000명의 시위대가 FDA 정문까지 몰려가서 외쳤다. 당시 FDA 청장이었던 Frank Young을 체포하라고 부르짖었다. 11

1990년까지 AIDS 환자와 옹호자들의 조직적인 시위가 계속되자, FDA는 정책의 결정 과정에 환자를 참여시켰다. 또한 모든 자문위원회에 적어도 환자 대표 한 명을 구성원으로 포함시켰다. 12 1991년 2월 자문위원회는 새로운 개념인 대리변수(surrogate endpoint)를 논의하였다. AIDS의 치료제의 경우 대리 변수로 약효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에 합의하였다. 13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서 관찰되는 임상변수(clinical endpoint)인 생존율 등을 근거로 임상적 이점(clinical benefit)을 판단해 왔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AIDS 환자에게 임상변수를 관찰하는 것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임상시험의 기간을 단축하여 좀더 빠르게 허가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리변수가 제시된 것이다. 

또한 1991년 7월 18일 자문위원회의에서 David Feigal은 조건부 허가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14 대리변수의 사용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대리변수에 근거하여 허가할 경우 장기간에 걸쳐 관찰되는 임상결과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의약품의 시판 후에라도 완료된 임상시험 결과를 재심사한다면 그런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심사를 통하여 의약품의 허가를 취소할 수도 있고, 새롭게 드러난 임상정보를 의약품의 첨부문서에 추가할 수도 있는 구상이었다.

1991년 10월 FDA는 대리 변수로 약효를 판단하여 DDI를 신약으로 허가하였다. 임상시험에서 DDI를 처방받는 환자의 혈액 mL당 CD4 세포 수치를 대리변수로 삼았다. 이 수치의 변화로 약효를 판단한 다음 DDI를 조건부로 허가하였다. DDI가 시판되더라도 임상시험은 계속 수행하고, 임상시험이 완결되면 그 결과를 재심사받는다는 조건이었다. 15

참고문헌

1. Casey B. Mulligan, Peltzman Revisited: Quantifying 21st Century Opportunity Costs of FDA Regulation, Becker Friedman Institute, 2021.12, 20p
2. Dale H. Gieringer, THE SAFETY AND EFFICACY OF NEW DRUG APPROVAL. Cato Journal, 1985, vol. 5, issue 1, 177-201
3. Dr. Henry I. Miller, The FDA has problems -- Here are the qualities the next commissioner must have to fix them, Foxnews, 2019.03.10 수정, 2022.02.01 접속,  https://www.foxnews.com/opinion/the-fda-has-problems-here-are-the-qualities-the-next-commissioner-must-have-to-fix-them
4. Nichols E, Expanding Access to Investigational Therapies for HIV Infection and AIDS: March 12–13, 1990 Conference Summary,Institute of Medicine (US) Roundtable for the Development of Drugs and Vaccines Against AIDS. Washington (DC): National Academies Press (US); 1991.
5. Samuel Broder, The development of antiretroviral therapy and its impact on the HIV-1/AIDS pandemic, Antiviral Res. 2010 Jan:85(1):1
6. ALICE PARK, The Story Behind the First AIDS Drug, Time, 2017.03.19, 2022.01.12 접속 https://time.com/4705809/first-aids-drug-azt
7. M A Fischl 등, The efficacy of azidothymidine (AZT) in the treatment of patients with AIDS and AIDS-related complex. A double-blind, placebo-controlled trial,, N Engl Med. Jul 23; 317(4):185-91
8. 근거문헌 4와 동일
9. AISHA HARRIS, How Accurate Is Dallas Buyers Club?, Slate, NOV 01, 2013, 2022.02.07 접속, https://slate.com/culture/2013/11/dallas-buyers-club-true-story-fact-and-fiction-in-the-matthew-mcconaughey-movie-about-ron-woodroof.html
10. Dylan Matthews, What ‘Dallas Buyers Club’ got wrong about the AIDS crisis, The washington post, 2012.12.10, 2021.01.12 접속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wp/2013/12/10/what-dallas-buyers-club-got-wrong-about-the-aids-crisis
11. Paul Duggan, 1,000 SWARM FDA'S ROCKVILLE OFFICE TO DEMAND APPROVAL OF AIDS DRUGS, The Washington Post, October 12, 1988.
12. The History of FDA's Role in Preventing the Spread of HIV/AIDS, FDA, 2019.03.14, 2022.02.05 접속 https://www.fda.gov/about-fda/fda-history-exhibits/history-fdas-role-preventing-spread-hivaids
13. CD4 LEVELS ARE PRIMARY BUT PARTIAL SURROGATE MARKER IN AIDS THERAPY, NCI RESEARCHER TELLS ADVISORY CMTE.; PANEL SUPPORTS CD4 ENDPOINT WITH CAVEATS, News, The Pink Sheet, 1991.2.18
14. BRISTOL-MYERS SQUIBB's VIDEX (ddI) RECOMMENDED FOR APPROVAL IN TREATING AIDS IN ADULTS AND CHILDREN INTOLERANT OR RESISTANT TO RETROVIR (AZT), The Pink Sheet, news, 22 Jul 1991
15. DDI Approved After Binational Review, FDA Consumer, Vol. 25 No. 10 December 1991,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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