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이화현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 정책기획팀 PM 

사진 =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 제공.

제26회 세계 백신 회의(World Vaccine Congress, WVC)의 막을 여는 키노트 스피치에서 백신학(Vaccinology)이 직면한 전례 없는 위기와 새로운 소명이 제시됐다. 이번 강연은 Gregory A. Poland 박사(미국 Mayo Clinic 백신연구그룹 디렉터)가 연사로 나서 '백신학의 변곡점: 4악장의 교향곡(The Inflection Point of Vaccinology: A Symphony in Four Movements)'이라는 주제를 통해 과학적 성취를 넘어 사회적 신뢰와 진실의 문제로 확장된 현재의 위기를 심도 있게 조명했다. 그는 백신학이 더 이상 단순한 과학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인식과 신뢰 구조 속에서 시험받는 '문명적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1악장  성공이 만들어낸 '망각의 역설'

강연은 과거 병동을 가득 채웠던 소아마비 환자의 '아이언 렁(Iron Lung)' 기계음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는 과학적 규율, 실험, 재현성, 동료 검토라는 엄격한 과정을 통해 백신이 만들어낸 인류의 대표적인 성취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취약성을 낳았다.

질병이 사라지면서 그 고통에 대한 사회적 기억 역시 희미해졌고, 그 결과 예방의 필요성은 점차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연사는 이를 '문화적 건망증(cultural amnesia)'으로 설명하며, 백신의 성공이 오히려 백신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2악장  과학을 넘어선 '인식론적 위기'

연사는 현재 백신학이 직면한 핵심 문제를 생물학적 난제가 아닌 ‘인식론적(epistemological) 위기’로 규정했다. 이는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과학은 불확실성과 점진적 축적을 기반으로 발전하지만, 정치적·이념적 서사는 단순성과 확신을 기반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점차 과학적 근거(evidence)보다 정치적 서사(narrative)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연사는 근거 없는 정보가 확산되며 불신(distrust)이 감염병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부 공공 보건 논의에서조차 과학적 기준이 흔들리는 현상을 '집단적 사회 자해(collective self-sabotage)'로 표현했다.

 새로운 소명  'Physicianaries'의 등장

강연의 후반부에서 연사는 참석자들에게 ‘Physicianaries(Physician + Visionary)’라는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연구하고 전달하는 것을 넘어, 거짓 정보와 정치적 왜곡에 맞서 진실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연사는 백신학이 이제 과학적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정당성과 신뢰 자체를 방어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강조했다.

 결론  백신 산업, 기술에서 신뢰로

연설은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됐다. 이는 과학자와 산업 관계자들이 안정적인 환경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진실과 신뢰를 지키기 위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강한 촉구였다.

과학적 성취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성취가 실제 사회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결국 백신 산업의 미래는 기술 발전의 속도보다, 사회가 과학적 진실을 얼마나 신뢰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흐름은 백신 산업이 단순한 기술 중심 산업에서 벗어나, 과학적 신뢰와 사회적 수용성을 함께 확보해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는 이번 WVC 2026 키노트를 통해 확인된 글로벌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국내 산업이 직면한 신뢰 기반 이슈를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산업계와 정책 당국 간의 소통을 강화하는 한편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정보 전달과 국제 협력 네트워크 확대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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