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원 'R&D 실패란 무엇인가: 정의·책임·미래 설계' 토론회
염한웅 IBS 단장 "평가 구조 바꾸지 않으면 혁신 없어"

한국의 연구개발(R&D) 성공률이 90%를 넘는다는 통계가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평가 방식과 통계 산출 구조에서 비롯된 착시에 가깝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실패를 전제로 한 학습 구조와 정책 설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개별 과제의 성공 여부만 따지는 현재의 R&D 실패 논의는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정진호)은 16일 서울 더플라자 호텔에서 'R&D 실패란 무엇인가: 정의·책임·미래 설계'를 주제로 제247회 한림원탁토론회를 열었다. 행사에서 염한웅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이 발제자로 나서 'R&D 실패론의 팩트와 정책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염 단장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R&D 성공률 99%는 성공 과제 대비 실패 과제 비율이 아니라 평가 등급 자료를 임의로 가공한 수치"라고 밝혔다.
그는 "대부분의 국가 R&D 과제는 성공과 실패로 평가되지 않고 '우수·양호·보통·불성실' 같은 등급으로 평가된다"며 "산업부 산하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일부 사업화 과제만 성공 혹은 실패로 구분되는데 이 비율을 전체 R&D 예산에 대입해 99% 성공률이라는 수치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성공한 과제 수를 전체 완료 과제에서 불성실 과제를 제외한 값으로 나눈 통계로 정책 판단을 하는 것은 데이터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염 단장은 과학기술 연구의 본질이 반복된 실패 위에서 성과가 축적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견과 발전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이뤄지는데 제도적으로는 성공한 결과만 축적되고 실패한 결과는 데이터로 남지 않아 학습 자산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평가 제도가 연구 결과보다는 과제 선정 단계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다는 점도 짚었다. 염 단장은 "개별 연구 과제는 사후에 제대로 된 성과 평가를 받지 않는다"며 "형식적인 평가만 있을 뿐 성공 실패를 논할 구조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국가 R&D 사업과 프로그램은 명확한 미션과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 이후에는 정책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다"며 "이것이 한국 R&D 정책의 구조적 한계"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도전적 연구' 지원 정책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염 단장은 "도전적인 연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없이 과제를 공모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에 불과하다"며 "모든 수준 높은 과학 연구는 본질적으로 도전적이며 도전성과 연구 수준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고등연구계획국(DARPA)식 연구개발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미션 설정과 비용 효율성 관리, 마일스톤 기반 성과 책임 체계 없이 제도 이름만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한국은 국가 R&D의 거시적 미션과 전략이 부재하다"며 "개별 과제의 성공 실패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전체 프로그램과 정책의 성패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잘못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패론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기존 과학기술 정책 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고 평가했다.
염 단장 발제에 앞서 사회를 맡은 김윤영 한림원 부원장도 "우리나라 R&D 성공률은 높지만 체감하는 혁신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실패가 곧 연구 중단과 과제 배제라는 인식이 연구자들로 하여금 안전한 과제만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패가 새로운 학습과 도전의 밑거름이 되는 연구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산업계와 학계, 투자업계, 언론 등 다양한 주체 인사들이 모였다. 홍성욱 한림원 정책학 부장이 좌장을 맡은 가운데 염 단장을 비롯해 이정동 서울대 교수, 김명기 LSK인베스트먼트 대표,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데일리뉴스팀장이 각 분야의 시선을 담아 R&D 실패를 둘러싼 제도와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