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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으로 나라 지키던' 제약사들, 약가 방어엔 포장이 필요

몇 년 전 일본 백화점에 들러 선물을 골라 계산하려는데 캐시어가 '종이가방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렇다 했더니 몇 장이 필요하냐고 다시 질문했다.
'하나면 되는 것 아냐? 몇 장씩이나 왜 필요하지?' 알게된 이유는 흥미로웠다. 의문의 또다른 가방은 '구겨지지 않은 종이가방으로 주려는 배려였던 것'이다. 선물을 들고가다 찢어지거나 달랑거리는 가방으로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은 실례라고 캐시어가 생각했던 것이다. 선물은 이미 포장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국내 제약업계의 약가 이야기를 듣다 몇 장의 종이가방이 필요하냐던 일화가 떠올랐고, 국내 제약업계는 사후약가 관리 기전을 어필하기 전 무엇을 보여줬는가 하는 비판적 질문이 따라 붙었다. 물론 국내 제약회사들이 간당간당한 채산성을 마다 않고 생산하는 제품이 적지 않다는 현실을 전제로 말이다. 예를들어 보령이 제조를 맡아 생산중단 위기를 피한 항암제 5-FU나, 코로나19 당시 생산라인까지 확충하며 제품을 만든 삼일제약 슈다페드와 코오롱제약 코슈 등이다. 정부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도 약가 인상이나 보전, 이도 아니면 지원은 국민 입장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약가를 올리면 기업들이 돈을 번다는 뜨악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건강보험 재정 지속성을 이유로 약가를 깎으려만 했던 정부의 움직임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제네릭 과당경쟁으로 돈되는 제품만 만들다가 이제 와서 약가를 말하는 업계의 움직임이 반발을 산 것일까? 진실이든 아니든 여러가지 요인을 추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제약업계는 '약가'를 위해 그동안 무엇을 보여주었나. 국내 제약사들은 일제강점기를 제외해도 80여년 '제약보국'(製藥報國, 약을 만들어 나라를 지킨다)이나 '제약구세'(製藥救世, 약을 만들어 세상을 구한다)라는 이미지를 지켜왔다. 일본 제국주의 압정과 전쟁의 상흔, 고도성장기 의약품 자주권이 흔들릴 때도 국민을 위해 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은 이어졌다. 독립운동까지 참여하며 지켜온 회사를 사회에 내어놓은 유한양행의 유일한 창업주, 돈이 안되면서도 수액에 온힘을 쏟은 JW중외제약의 성천 이기석 창업주, 국내에 없던 원료의약품을 합성하기 위해 열정을 바친 고촌 이종근 창업주 등의 정신은 제약업계를 넘어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약가 문제에 관한한 제약업계의 노력에도, 왜 '더 받아야 하는지'는 납득시키지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야 지원책을 내놓기 시작한 정부와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옆나라 일본 사례를 보자. 사와이제약을 비롯해 니프로 등 주요 기업이 참여한 일본제네릭제약협회는 코로나19 당시 제네릭 약가 문제로 직격탄을 맞았다. 자국 내 원료 부족으로 주요 제품의 생산이 부족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수면제 성분이 혼입된 무좀약 사건으로 복용 후 운전 중 사망 사고 등이 일어난 고바야시화공의 GMP 위반 사건 등으로 입지는 한껏 좁아졌다. 2020년부터 기존 2년 주기로 진행하던 약가개정을 1년 단위로 쪼개면서 수익성에도 불이 떨어졌다.
협회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의약품 공급 문제를 꺼내들었다. 각 회원사에게 강한 징계를 내리는 것은 물론 각 회사별로 현재 생산 중인 제품의 공급 상황과 부족시 언제 해소가 가능한지, 원료는 어느 나라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제조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을 협회에 구체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회원사에게 안정 공급을 위한 매뉴얼 개정을 독려하는 한편 매년 1회 이상 언론을 통한 공급상황 기자회견, 지역별로 활용가능한 제네릭을 처방 조제할 수 있도록 지역별 협의회 설명회, 우리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후생노동성은 물론 경제산업성 등 관련 유관기관과 월례회의 정례화 등도 진행했다.
물론 그 역할이 약가 정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단언하기 어렵지만, 제약업계 안의 여러 협회 노력이 한국보다 약가를 짜게 책정한다는 일본 정부가 2023년말부터 이와 필수의약품 및 약가 등재 후 장기수재의약품의 가격 보전 등을 시행하도록 만든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둔다.
실제 우리 나라의 경우 최근 수년간 제약사의 장기품절시 보고 등이 운영되고는 있지만 기준이 상대적으로 모호하고 실제 생산을 일시중단하는 품목의 수가 실제 약국가나 유통업체 등으로부터 듣는 수가 현저히 적은 것은 어느 정도 업계 내부에서도 상당수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다.
더욱이 이같은 업계 자체 보고의 경우 유관 협회에서도 사실상 자율성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위 '영업비밀 유출'의 가능성이 있어 강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과 몇 년전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우리도 우리 약의 사회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을 일갈했을 때 '그래 이거지'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었지만 아쉬운 점이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심리학 관련 책에서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할 때는 해야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라고 이야기한다. 유럽 중세사회 변화의 시발점이 된 십자군 전쟁 역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신께서 원하신다'라는 한 마디로 시작됐다. 사람들은 이걸 '명분'이라고 표현한다.
명분을 다듬어 스스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배려다. 배고픈 이에게 과자상자를 던져주는 것이 명분이라면, 상대방이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종이를 펼쳐 자르고 상자 모양에 맞춰 포장해주는 것은 배려다. 정부도 무작정 약가인하를 하기보다 국산 원료, 국가필수의약품의 약가 보전 및 인상 등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명분을 갖춰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건 상대방에게 깨끗하게 내어줄 '제약업계의 예쁜 종이가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