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리 스토리 [1]

Juice & Smoothie 만드는 법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만으로 3주일간의 디톡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가벼운 몸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다. 꿈속에서는 이미 비키니를 입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있다. 아무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기 이전까지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야 할 조건도 없었다. 단지 신선한 공기를 실내에 유입해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무심코 창문을 연다. 그 순간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하얀 가루들이 창문 프레임 밖에서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다. 나뭇가지들마다 눈이 내려앉은 것을 보면 방금 내린 눈은 아니다. 내가 창문을 열기 이전부터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창문을 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내가 창문을 열기 이전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인 듯이 들리기도 한다. 창문을 열고 나의 지각으로 확인하기 이전까지는 눈에 대한 어떤 실재들도 나의 생각 안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나의 지각 안에 들어오지 않은 개념들을 언급할 때 이처럼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각하지 않은 실재는 실재가 아닌 것과 다르지 않은 사태이다. 내가 ‘창문을 열었는데 눈이 내린다.’고 말하든, 그렇지 않든, 눈은 어느 시점부터 내리고 있었다. 나의 지각과는 무관하게 눈이 내리고 있는 사태가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를 생각해보고 싶다. 도대체 나의 지각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실재가 실재이든, 실재가 아니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창문을 열지 않았다면 눈은 없었던 것이고, 오후에 녹아내린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영원히 우리는 그 눈의 실재를 알지 못하였을 터이다. 게으른 탓에 하루 종일 창문을 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밤이 되어 꿈속에서 비키니 출렁이는 바닷가를 보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는데 화창한 하늘 아래 펼쳐진 또 다른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면 어찌할 터인가.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황당하다. 이렇게 신비로운 설국이 단지 나의 지각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의지적 고백만으로 실재 아님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혹자는 그 고백이 ‘어찌하여 의지적인가’고 묻는다. 고백은 처음부터 의지의 친구였다.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듣는 다면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하고 있는 주체가 무의식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러하다면 세상의 모든 사랑 고백이 의식 없는 주체의 옹알이라고 말해도 좋다는 말인가.

나의 지각 안에 들어오지 않은 실재가 실재이든, 실재가 아니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더 흥미로운 문제는 그것이 의지적 작용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고려이다. 만약 의지적 고백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실재이든, 실재 아님이든, 세계와 무관할 터이고, 의지적 고백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지각 안에 있든, 지각 밖에 있든, 주체와 상관없는 일이 될 터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와 고백의 주체는, 의지가 있든 없든 세계 아님과 주체 아님의 바깥 쪽에서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의 처음과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우리의 고백이 갖는 목표들에 대해서 나는 어디까지 책임지는 일이 가능한가. 아침에 창문을 열지 않았다고 해서 오류가 발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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