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리 스토리 [8]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하다. 연인의 마지막 멜로디는 작품 안에 담겨 비문처럼 새겨진다. 어두움이 짙게 내려앉은 파리, 눈 내리는 겨울 밤, 붉은 풍차가 화려한 쇼를 상징한다.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의 뮤지컬 영화 물랑 루즈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작품을 직접 감상할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무희와 가난한 작가’라는 등장인물이 그려내는 이미지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펼쳐지는 작품이다. 예전에 우리가 마음에 두었던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진실, 아름다움, 보헤미안 정신(자유),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

진실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네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알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보여 지는 것과는 달리 영화의 결말은 연인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랑보다 강하고 질투의 불길보다 열정적인 죽음의 병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 누구도 그날 아침에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있었다면 우리는 어떤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고대 그리스 신전마다 드리워진 조각처럼 완벽한 비율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까. 물랑 루즈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고귀한 캐릭터는 오직 공작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극장의 쇼걸, 창녀, 광대, 가난한 작가, 딴따라를(?) 대변하는 악사들이다. 공작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자신의 소유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가득한 이념의 깃발이다. 깃발, 그것은 진실이나 보헤미안 정신의 동반자이다. 자유를 말하는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 아닌가.

자유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어두운 도심을 비추는 화려한 등불이 반짝이는 빨간 풍차의 움직임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눈까지 내리는 겨울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몽환적인 파리의 밤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하얗게 내린 눈으로 둘러싸인 지붕들 위로 빨간 풍차 불빛이 천천히 돌아가는 환락의 거리, 쇼걸들의 진한 화장 사이로 언뜻 언뜻 비쳐지는 향수병, 알록달록한 광대들의 웃음소리, 기타 등등. 이보다 더 보헤미안 정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무대는 또 보기 어렵다. 우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난한 작가 양반은 가진 것이 없으니, 얼마나 가벼운 삶인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땅이 없으니 얼마나 여유로운가. 머물러야 할 조건이 없으니 언제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다. 일찍이 우리가 꿈 꾸어왔던 자유로운 조건들을 두루 갖춘 셈이다.

진실, 아름다움, 보헤미안 정신을 모두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항목은 사랑이다. 앞에 말한 세 가지 가운데 단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사랑을 이야기 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진실이 아니었다면 사랑을 사랑이라고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답지 않다면 서로의 매력은 전통과 관습 안에 제한된 편견이었을 것이다. 보헤미안 정신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솜털처럼 가벼운 사랑을, 무거운 삶의 무게로 압박해 버렸을 것이다.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어서, 어디든지 떠날 수 있어서, 지옥처럼 강렬한 죽음의 병이 있어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아름다운 고귀함의 대명사, ‘공작’이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속도감을 지니며 눈 내리는 도시의 겨울밤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사랑에 빠져버린 연인들 스스로마저 침식해들어 가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들이 믿었던 진실, 아름다움, 보헤미안 정신을 무제한으로 소비하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개된다. 혹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 소비의 정점이라고 비유한다. 내가 그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글 : 이 체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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