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리 스토리 [12]

추상성과 선험성은 등가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같은 위치에 놓고 비교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것이다. "선험적 이성의 추상성"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내 눈에 띈 것은 미적 경험에 대한 다채로운 시대사조를 서술한 책을 읽은 데서 비롯한다. 책 내용의 전후 관계에서 볼 때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문득, 그와 같은 단어들의 조합을 전체적인 구성에서 떼어 놓고 살펴본다. 개념의 보편화를 구체적 경험들과 상반되는 것으로 묘사하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이른 판단이었을까.
 
우리의 추상성은 생생한 현재성의 특징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경우에만 사용된다. 살아 있는 현재성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원초적 처음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물리적 생성만으로 해석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뱃속에서 살아 숨 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태아의 정신세계를 자연 법칙으로만 해석 가능하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마도 세상의 모든 형이상학자들이 아무런 고민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앞뜰과 뒷동산을 산책하며 율리우스의 무용담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다. 경험 이전의 세계는 이처럼 개별적 경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생생한 현재성을 설명해야겠다는 주체가 경험 이전의 보편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현재성의 현상만을 재현하는 사태에 이를 것이다. 연인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누리고 있는 환희와 슬픔의 변주곡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특징들이 추상성을 배제하고는, 현재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이성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사명으로 하는 철학적 문제들은 처음의 원형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병아리와 알, 두 가지 사태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인지 말해야 하는 것과는 그 기원이 다르다. 병아리, 또는, 알은 두 가지 모두, 경험 이전의 사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추상성의 스타일을 선험성과 혼동하고 싶어 하는 부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와 같은 행위에서 비롯한 결과들이 반드시 오류에 이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선험성 안에 추상적 특징들이 일부분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적 스타일이 경험 이전의 세계를 모두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현재성이 깃들여 있지 않은 추상성은 진정한 의미의 개념성은 아니다. 구체적 경험들과 추상성을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하는 온갖 오류들을 감내할 만큼, 우리들의 현재성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연인을 곁에 두고 있는 사자에 비유할 수밖에 없는 원형적 경험을 가진 경우, 그것은 추상적 스타일도 아니고, 연인의 관념화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더욱이 구체적 경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상정하면서 비롯하는 오류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현재성에 대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아무튼 우리는 “선험적 이성의 추상적 경향”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을 순순히 보아 넘기기 어렵다. 경험보다 앞서 있는 이성의 원형은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아름다움 곁에서 개념의 보편화라는 추상성을 긍정적 의미에서 바라볼 수 없다면 우리의 미적 경향은 그야말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방향성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생생한 개별적 경험이 어디에서부터 비롯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저 현상에 만족하면서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서있고 싶다면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1초 전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시냇물과 1초 이후의 물은 같은 시냇물이 아니다.

물론 그와 같은 다름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 개별적 다름이 현상으로만 묘사된다면 우리는 2초 이후의 미래를 어떻게 꿈꾸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의 선험성은 생생한 경험에 가장 가깝게 대응하는 경우에만 추상성을 설정한다. 1초 이전의 선험성과 1초 이후의 보편성이 바로 생생한 현재의 개념성이다.

글 : 이 체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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