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R&D를 사랑한 남자, 故 임성기 회장

임성기 회장은 2016년 1월 21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회 한미약품 오픈이노베이션 포럼'에 나와 미래 신약강국을 만들자며 17분간 건배사와 함께 건배를 제의했다.
임성기 회장은 2016년 1월 21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회 한미약품 오픈이노베이션 포럼'에 나와
미래 신약강국을 만들자며 17분간 연설했다.

"난 말이야, 뭔가 그 어떤 혁신적인 치료제를 개발해서 아픈 사람들을 낫게하고 싶어. 원래부터도 그런 마음으로 제약회사를 세웠잖아, 내가. 이러니 나한테나 한미약품에게 R&D는 신앙이나 다름없는 데, 사람들은 자꾸 비정상적으로 R&D만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거 같애. 제약회사 하는 사람들 마음이 다 자기 이름의 그 뭔가, 신약을 갖고 싶지 않겠어? 신약이 잘 되면 회사도 잘되고, 국가 경제에도 보탬을 줄 수 있고...신약 R&D 그게 참 매력이 있단 말이지."

억 단위를 훌쩍 뛰어넘겨, 조 단위 신약후보 물질 기술수출을 여러 건 성사시켰던 2015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2016년 어느 봄날 저녁 故 임성기 회장과 소주를 곁들인 식사자리에서 "회장님에게 R&D란 대체 어떤 의미냐"고 질문했을 때 임 회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 마치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는 소년의 얼굴로 이같이 말했다. 그러고는 "내가 오늘 조 기자 만나 기분이 좋았나봐. 자자, 그런 얘기 그만하고, 한잔합시다."며 화제를 돌렸다.

2020년 8월,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계의 모습은 어떤가. 신약개발을 테마로 바이오벤처들의 창업은 꾸준히 이어지고, 주식 시장의 제약바이오 주엔 돈이 몰리고 있다. 전통 제약회사와 바이오벤처의 기술수출 소식은 특별하지 않을만큼 종종 들려와 일상처럼됐다. 대한민국 바이오제약 생태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이 생겨나 꽃을 피우며, 이 사이로 꿀벌들이 날고, 이곳 저곳 열매가 맺히는 선순환 사이클이 작동하고 있다.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잠재력이 있었지만, 성공 경험 부존재로 스스로를 의심하던 제약바이오산업계 일원들에게 강렬한 성공 자극을 주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동기를 부여해 준 인물, 단언컨대 故 임성기 회장이다. 동기 부여와 함께 글로벌 시장이 대한민국의 실력을 통채로 인정받도록 이끌어준 사람도 그였다. JP모건 컨퍼런스 등 글로벌 무대에서 2015년 임성기 회장과 한미약품의 퍼포먼스는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업체들의 위상을 한꺼번에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2016년 1월 21일 신라호텔 그랜드볼룸. '한미약품 오픈 이노베이션 포럼'에서 임성기 회장의 17분 간 건배사를 겸한 연설은 600여명에 이르는 제약바이오 관계자들의 마음에 R&D의 열정을 지폈다. 동시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우리 모두 연구자가 되고, 우리 모두 R&D 없이 안되겠구나, 이런 생각 가지고 계신다면, 정말 저는 확신합니다. 제약강국, 신약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미래의 신약강국을, 정말 저 유럽 가운데 있는 스위스 조그만 나라가 제약강국이듯, 아시아 극동의 대한민국이 제약 강국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안될 이유가 뭡니까. 저는 확신을 갖습니다."(당시 필자 휴대폰으로 녹음했던 파일서 일부 내용 발췌)

1940년 생 임성기 회장은 R&D를 사랑한 혁신 기업가였다. 1973년 '임성기제약회사(나중에 한미약품으로 사명 변경)'를 설립한 이후 그는 연구개발(R&D)에 매달렸다. 한미약품보다 회사 규모가 훨씬 큰 제약회사들도 R&D의 불확실성 때문에 망설이며 영업중심형 회사를 이끌 때 그는 연구소를 차리고, 연구원을 뽑고, 합성공장을 짓는 등 먼저 움직였다. 초창기 그의 남다른 모습엔 비아냥도 따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구소장 시절 회장님이 차에다가 돼지 고기와 막걸리를 잔뜩 싣고 오셔서 회식을 한적이 꽤 여러번 있었어요. 당시 임성기 사장님은 연구원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시면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느냐, 어려운 것은 없느냐 등등 요모조모 여쭤보셨어요. 그러시다가는 '자자, 우리가 당장은 안되더라도, 시행착오가 쌓이다 보면 뭔가, 그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격려해 주셨죠. 질책보다 격려가 많아 연구원 모두 사기충천했던 그 시절이 종종 생각납니다."(이관순 한미약품 부회장)  

故 임성기 회장의 인생은 '혁신 기업가'의 길로 점철돼 있다.  창업자나 최고경영자라는 타이틀은 그와 적합하지 않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약국,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 등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답게' 그의 삶의 시간을 보냈다. '약사답게, 제약회사 답게'라는 말은 본질을 바로보자는 것이고, 그에 합당한 책임의식으로 그는 자신을 몰아 세웠다. "젊은 시절 내가 참 하고 싶은 게  많았어. 그런데 제약회사를 차리고 다 접었잖아. 한가지에 몰두해도 부족한 인생이니까."

1973년, '남들과 다르게'를 외치며 서른 넷의 나이에 회사를 세운 임성기 회장은 원료 합성 연구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전력을 다한 끝에 1989년, 3세대 항생제 세프트리악손 제조기술을 스위스 로슈에게 600만 달러를 받고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내로라하던 매출 최상위 업체들도 하지 못한 기술 수출을, 고작 16년 차 회사가 국내 제약산업계 최초로 해냈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1997년, 임성기 회장은 R&D 투자로 발전시켜온 제제기술을 바탕으로 마이크로 에멀젼 면역억제제를 개발해 스위스 노바티스에 국내 및 해외시장에서 판매하지 않는 조건으로 7400만 달러를 받고 기술을 판매했다. 첫 번째 기술 수출 후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자릿수 하나를 더 늘린 기술 수출료"를 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IMF 사태로 나라경제가 피폐했던 시절 한미의 기술 수출은 많은 기업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성과로 내놓았다.

2015년 기술수출 성과이후 전임직원에게 주식을 나눠줬을 때 "어떻게 그렇게 큰 결단을 하셨냐"고 물으니 "내가 그동안 R&D 하느냐고, 임직원들에게 너무 못해줬어. 직장인들에게 월급은 생활비잖아. 이번에 내가 조금이나마 한거 같아서 마음이 좋아."라고 했던 기억도 두서없이 새롭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임성기 회장의 비보와 관련해 '큰별이 졌다'고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제약바이오 산업과 영원히 함께 할 그 이름'이라고 말하고 싶다. 故 임성기 회장의 이름은 명멸(明滅)의 이름이 아니라 샛별들과 함께 늘 같이 빛날 이름이다. 혁신 기업가 임성기. 이 이름석자(그가 평소 책임감을 강조할 때 즐겨 사용하던 말)는 제약바이오 산업계를 넘어 대한민국 전 산업계에서 빛나고 조명돼야할 이름이다.

PS, 2016년 그 날 저녁 임성기 회장은 말했었다. "난, 말야, 한미약품이 500년 1000년가는 장수기업이 됐으면 좋겠어.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질병 치료제를 내기 위해 중단없이 R&D를 하는 장수기업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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