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누가 오늘의 K-팝을 예상했었나...K바이오, 너를 믿는다

글로벌 제약회사, 세계 곳곳의 바이오벤처기업과 투자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JP 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의 시간'이 올해도 찾아왔다. 매년 1월 열리는 이 행사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의 연구개발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변화되고 구성되는지, 돈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내가 가진 파이프라인은 국제적으로도 매력적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국내 제약회사들과 바이오벤처들도 이 때문에 대거 참석하고 있는데 몇년 새 '무대의 주연급 조연'으로 불러도 손색없을만큼 위상도 커졌다. 현장에서 글로벌 제약사와 공동연구에 서명을 하고, 이 행사와 별도로 '코리아 나이트(Korea Night)'를 성대하게 개최할만큼 K제약바이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즈음 소환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 한미약품 R&D를 이끌고,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에 불을 붙여놓은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이관순 한미약품 부회장이다. 연구소장이었던 그는 2003년 바이오USA 행사장에 차려진 글로벌 제약회사 부스를 방문중이었다. 연구를 통해 조금 성과를 낸 기술을 소개하기 위해 그는 컨피덴셜(Confidential)이라는 붉은 색 단어가 선명하게 찍힌 연구자료 15장과 기밀유지협약(CDA; Confidential disclosure agreement) 문서 15장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부스 담당자들은 CDA를 다룰 권한이 없다며 회피하거나 거절했다. 키 180cm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그였지만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사장에서 왜소했고 좌절했으며 길을 잃었다. 이 소장의 모습이 국내 제약산업의 현실이었다.

"이 소장, 어떻게 됐어?" 빅파마들이 연구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는 지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임성기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CDA 때문에 설명을 못했다"고 하자, 임 회장은 "그러면 CDA없이 한번 해보지"라며 안타까워했다. 문제는 스탬프로 찍은 Confidential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이관순 소장은 Confidential 앞에 NON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연구자료 15장을 모두 NON-Confidential로 바꾸고 나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웃음이 나오고, 눈물나는 이 노력 덕분이었는지 몇몇 회사들이 설명기회를 줬고, 이 소장이 귀국 후 얼마지나지 않아 '한번 방문해 설명해 달라'는 연락도 받았다. 따지고 보면 2015년 한미약품 기술수출 러시는 이같은 시행착오의 연장선상에 있는 성과인 셈이다.

JPM 행사에 참석한 김문정 싸토리우스 코리아 상무가 커피를 마시며 바라본 풍경. 김 상무는 JPM 행사장에서 가장 전망좋다는 커피숍에서 비온 뒤 화창한 샌프란시스코를 카메라에 담아 SNS에 올렸다. "한국분들 테이블도 여럿"이라고 언급한 김 상무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연구자로서 어떤 꿈을 상상했을까?

매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JP 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는 국내 제약바이오인들의 주요 일정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4분기에 접어들면 어느 기업이 어떤 프로젝트를 소개하는지, 누가 참석하는지조차 뉴스가 되며 술렁인다. 이 행사가 인기가 있는 것은 잘하는 기업들의 연구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미리 살펴볼 수 있는데다, 미래 글로벌 파트너들에게 조금씩 러브콜을 보내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의 SNS글도 이 행사를 잘 설명해 준다. "재미교포 1세들이 악착같이 돈벌어서 자식교육을 잘 시키고, 또 교포 2세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지 미국 제약바이오 VC, PE, 벤처, 투자은행, 로펌 등의 핵심멤버로 활약하게 되면서 나같은 한국 본토 사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글로벌 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행사는 '바이오시사회'나 다르지 않다. 

'JP 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의 시간'에 서울 방배동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서도 흥미롭고 의미가 큰 기자간담이 열렸다. 보스턴으로, 아일랜드로, 독일로 국내 제약회사들의 글로벌 진출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날아다녔던 원희목 회장은 15일 120명의 기자들 앞에서 "산업계 스스로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선진국 혁신생태계에 뛰어들어 세계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가 양떼를 이끄는 목동처럼 '내수를 떠나 함께 푸른초장으로 떠나자'고 외치는 것은 삶의 터전이 글로벌 혁신생태계에 있다고 굳게 믿는 탓이다. '제약바이오산업은 국민산업'이라며 정부를 설득해 온 그가 산업계 플레이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려는 것은 내수의존형에서 글로벌개척형으로 산업계와 정부의 인식 패러다임을 전환해 실천으로 이끌려는데 있다.

내게 샌프란시스코는 금문교보다 각자 가정이 있는 30대 유부남(유동근), 유부녀(황신혜)의 '불륜 로맨스' 드라마 '애인(1996년)'으로 떠오른다. 출퇴근하며 차 안에서 테이프를 되돌려 듣던 "If you're goin'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의 OST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2020년 샌프란시스코는 멋진 작품(신약후보 물질)으로 빅딜을 꿈꾸는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인의 꿈으로부터 소환된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려면 머리에 몇 송이 꽃을 꽂는 로맨티스트대신,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해줄 연구결과가 담긴 USB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과연 누가 오늘 날 케이팝을 상상할 수 있었나. 꿈을 꾸고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이 케이팝의 꼬리를 물고 따르고 있다. 2020년도 파이팅.    

저작권자 © 히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