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쉼표] 올리브헬스케어 이병일 대표

묵묵히 걷는 세온이. 이 아이가 바라보는 곳은 어디일까?
묵묵히 걷는 세온이. 이 아이가 바라보는 곳은 어디일까?

물어보고 싶었다.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아들(이세온·11)과의 일상을 고스란히 노출해도 괜찮은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세상의 시선과 편견은 이미 그에게 익숙하니까. 아들과 함께 한 2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올리브헬스케어 이병일 대표를 만났다. 그는 임상시험 지원 온라인 플랫폼인 ‘올리브씨’를 운영하고 있다. 그 길 역시 가보지 않은 미지(未知)의 상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야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800km 도보여행 길이다. 이병일 대표와 그의 아들 이세온은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 피에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는 전통의 순례길을 20일간 200km를 걷는 달팽이 도보여행을 경험했다.

한 달간의 휴가를 결단한 이유부터 대뜸 물었다.

-3년차이긴 하지만 스타트업인데, 한 달씩이나 자리를 비우면...

“SK를 다니다 서른 일곱에 첫 창업을 했어요. 그때 10년 후에는 꼭 하고 싶은 일, 버킷리스트라 하죠? 그걸 적어 봤어요.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창업을 하면 늘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3년만 버티면 살아 남는다는 말 많이 있잖아요? 3년이 지나면 도약할 수 있는 페이즈(phase)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창업 당시 직원들에게 3년 근무에 1달간 안식월을 공언했습니다. 그게 시작이에요”

“창업한 회사를 접고 들어간 엔자임이라는 홍보대행사에도 우연치 않게 안식월 제도가 있었어요. 엔자임에서의 첫 안식월 때 2박 3일간 기도원, 천주교에서 말하는 피정(避靜) 같은 걸 다녀왔는데,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 때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창업하기로 결심했어요. 앞으로만 가는게 미덕인 줄 알았는데, 멈춤, 돌아봄, 이런 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 달 간의 첫 휴가를 지내면서 깨달았어요.”

그렇게 이 대표는 올리브헬스케어에서 안식월을 가지는 1호 근무자가 됐고 올해 말쯤 2호 직원도 나온다. 2015년 4월 1일에 회사를 창업했으니(구 HBA) 3년 3일만인 2018년 4월 4일 아들의 손을 잡고 그는 순례길을 떠났다.

-아들과의 여행, 3년을 열심히 달린 사람에게 주는 전환점 같은 거라면 여러 선택지가 있을텐데, 굳이 산티아고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사업을 한다는게 너무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적인 호기심도 있었고요. 나머지 하나는 명확히 일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싶었어요. 회사만 벗어나는게 아니라 스마트폰도 끊고 단순하게 육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했어요. 비용을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은데 3주간 여행에 한 600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비행기 값이 제일 큰데 나머지는 대부분 저렴합니다. 산티아고길은 순례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곳곳에 있는 숙소도 하루 밤에 조식 포함해서 2~3만이면 됩니다.”

순례길에서의 아빠와 아들. 그들은 그곳에서 그저 동반자였다.
순례길에서의 아빠와 아들. 그들은 그곳에서 그저 동반자였다.

-아들 세온군 이야기를 물어볼께요. 답하고 싶은 선까지만 하시면 됩니다. 일반사람도 먼 거리를 걷는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세상을 평온하게란 뜻입니다. 세온. 초등학교 5학년이고 자폐성 2급 장애인입니다. 언어장애도 조금 있어요. 아이 돌보는데 지쳤을 엄마도 쉬게 하고 싶었고 장애가 있든 말든 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리 가는 비행기에서 아이쿠, 고생길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세온이가 한 숨도 자지 않는거에요. 아이 케어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어요.”

“세온이는 자극에 예민해요. 서울에서는 사람도 많고 자극적인 음향에 불안해했는데, 산티아고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정서적이었어요. 세온이는 그 길에서 열심히 잘 걷고 잘 먹고 잘 잤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훌륭한 동반자였습니다. 시골길을 한없이 걷는 동안 세온이가 동화(내 도시락이 어디갔지)책 한 권을 다 외운다는 사실도 알게됐고 즐겨부르는 노래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순례길에서 익힌 인사말 부엔까뮈노(buen camino), 그라시아스(gracias), 아디오스(adios)도 곧잘 따라했어요.”

-산티아고 순례코스가 여러 개 잖아요? 세온이와 함께 하려면 순례길을 고르는데도 꽤 신경을 썼을 것 같습니다.

“예, 맞아요. 산티아고 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완주가 아니에요. 함께 걷는거지. 그래서 전통적으로 제일 유명한 길을 그냥 선택했어요.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 대성당이 있는 데콤포스텔라(de Compostela) 까지 가는 820km 길인데, 서울 부산의 2배 정도 됩니다. 하루 20km씩 40일 정도 가는데, 첫 날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스페인으로 들어갑니다. 원래 목표는 부르고스까지 가는거 였는데 로그리뇨까지만 갔어요. 보통 어른이 걸으면 1주일이면 되지만, 스케쥴을 짠다는 건 무의미했어요. 하루 10~15km를 걷는게 목표였으니까.”

-일부러 느리게 걷는, 달팽이 여행을 한 건 아니지만, 느리게 걷는다는 것.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고 싶어도 추구하지 못하는 로망 같은거 아닐까요?

달팽이 처럼 느리게 걷던 세온이는 달팽이를 만났다.
달팽이 처럼 느리게 걷던 세온이는 달팽이를 만났다.

“산티아고에도 코리안 루트가 있어요. 마치 자격증 따듯 산티아고에 와요. 일상에 지쳐 번 아웃된 사람들이 오지만 정작 여기까지 와서도 너무 빨리 걸어요. 그래서 데콤포스텔라를 100km를 남겨두고 시작하는 코리안 루트가 생겼을 정도에요.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겪은 산티아고 정신은 그런게 아니거든요. 물건도 최소한만 가져가고 필요 없는 건 다음 순례객을 위해 남겨둬요. 쉐어링하는거죠. 어차피 가져가도 필요없으니까.”

“아들과 같이 느리게 걷다보면 진짜 달팽이를 보기도 해요. 어떤 곳에선 하루 더 묵으며 수제 소시지나 치즈를 사먹기도 했어요. 세온이는 여기선 다른 아이가 아니었어요. 스튜디오를 열어 보여준 목공방 할아버지, 활동 등사기 사진을 경험하게 해준 골동품 사진가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느린 만큼 볼 수 있는, 자세한 것들이 따로 있었어요.”

이틀간의 여정으로 넘은 피레네 산맥길. 아빠는 불안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덤덤했다. 가벼운 동상을 입은 세온이는 대피소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이틀간의 여정으로 넘은 피레네 산맥길. 아빠는 불안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덤덤했다. 가벼운 동상을 입은 세온이는 대피소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피레네 산맥으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 국경 넘으면 큰일 날 것 같은 한국 사람 입장에선 판타스틱하기까지 한 신기한 일일 것 같아요.

“눈보라가 쳤어요. 다른 여행객 걸음으론 첫 날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지만 우리에겐 두 번째 날이에요. 기상정보를 보고 여행객 90%가 우회했다고 들었어요. 발달장애가 있는 코리안 부자가 11시간 난코스를 걸었다며 격려해준 순례객들이 많았어요. 졸지에 유명해졌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조난당할 뻔 했어요. 피레네 산맥 길은 4월초에 열려요. 그 첫 길을 걸은 셈이에요. 밑에는 봄인데 위에는 눈이 쌓여 있어요. 세상과 연결을 끊겠다는 생각으로 구글매핑도 안하고 올랐어요. 남들보다 절반 앞서 출발했는데 꼴지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눈은 오고 길은 언제 끝날지 모르겠고. SOS를 쳐 헬기구조를 받을까도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았나요?

“한 걸음만 더 가보자. 비상전화가 있는 대피소로 돌아가 SOS 칠수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스틱 하나가 부러지면서 10미터 이상 미끄러지기도 했어요. 세온이는 위에서 멀뚱멀뚱 바라봤어요. ‘아빠가 미끄럼틀타고 내려왔다. 아빠가 받아줄게. 내려와봐.’ 그렇게 아이를 달랬지만 암담했습니다. 그렇게 100미터를 더 가 산을 돌아서니 100미터 앞에 봄이 보였어요. 내 인생에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해 저녁 6시쯤 도착했으니 11시간 걸린 셈입니다. 우리를 지나친 순례객들이 코리안 부자가 너무 안온다고 수도원에서 기도도 하고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수도원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할아버지께서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보고 진정한 순례객이라며 조개 껍데기 마크를 세온이 목에 걸어주기도 했어요. 아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돌아서 울었습니다. 준비가 부족했던 아빠라는 생각에요.”

개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이방인들. 그리고 11시간 피레네 도보여행을 마친 세온에게 준 현지인들의 선물.
개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이방인들. 그리고 11시간 피레네 도보여행을 마친 세온에게 준 현지인들의 선물.

-세온이 상태는 어땠습니까?

“발목까지 다 젖었는데도 아이는 한 번도 찡그린 표정이 없었어요. 나는 오히려 끊임없이 불안해했는데 말이죠. 내 감정이 부끄럽기도 했어요. 애는 묵묵히 걷는데 더 안다는 나는 더 불안해 했어요. 10년이든, 20년이든 세온이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례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로그리뇨에서 일이에요. 그곳 숙소는 엄격해서 저녁 9시 이후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데, 저녁식사를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다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던거에요. 얼른 뛰어 갔지만 이미 문은 닫혔고, 짐은 다 숙소 안에 있고. 난감해하던 차에 세온이가 ‘똑! 똑! 똑! 문 열어주세요’라고 외쳤어요. 그 날 만큼은 예외적으로 그 문이 열렸어요. 느린 걸음이지만, 그렇게 세온이는 우리에게 열쇠가 되어 주기도 했어요.”

-아이에게 좋은 경험, 아빠와의 친밀감 이런걸 주려고 갔을텐데, 오히려 더 많이 얻고 배우고 온 것 같습니다.

“인상 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독일에서 온 안나는 사회복지사인데 까만색 안내견과 함께 왔어요. 개가 가는대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개걸음이나 세온이 걸음이나 속도가 비슷해요. 오스트리아에서 온 노부부는 맹인인 남편이 아내를 의지해서 걸어요. 벨기에에서 온 파스칼이라는 친구는 경계성 발달장애가 있었는데, 세온이 걸음에 맞춰서 걸어줬어요.”

“우리보다 모두 빠를거라 생각했지만 이튿날이 되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걷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묘했어요. 빨리 걸으려 애써도 결국 자기만의 속도를 찾게 되고 그게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은 살아가는 과정 아닐까요? 오늘 하루 잘 살자. 온전히 자기로 돌아가는 경험이 아들과 함께 한 순례길 내내 이어졌어요.”

여정의 마지막. 세온이는 물보라를 1시간 넘게 바라봤다. 로그리뇨의 햇빛은 다리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여정의 마지막. 세온이는 물보라를 1시간 넘게 바라봤다. 로그리뇨의 햇빛은 다리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로그로뇨에서의 마지막이 아쉬웠겠어요. 더 가고 싶은, 한국 사람들이 갖는 그런 목표의식이 있잖아요?

“세온이가 물보라를 보는 걸 좋아해요. 마지막 날 로그리뇨에 있는 개천? 강이라고 해야하나. 거기에 물보라가 계속 일고 있었어요. 세온이가 한 시간을 넘게 그 물보라만 봤어요. 여울이 일었고 햇빛이 다리 밑으로 반사됐어요. 아이는 우리의 일정이 끝난 걸 모르고 계속 걸어가려 했어요. 여정은 끝났지만 세온이와 또 함께 걸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종단, 완주, 이런게 어울리는 곳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속도, 저마다의 여정만 중요해요.”

안식월을 끝낸 지 벌써 반년이 넘게 흘렀다. 현실로 돌아오는데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고 그는 말했다. 이 대표는 올리브헬스케어 대표로서 또 다시 고군분투 중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 아이 걱정을 물었다.

“걱정 안해요. 그냥 걸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잘 걷고 못 걷고 이런게 있을까요. 내 속도에 맞춰 걸으면 내 인생 걷는 겁니다. 세온이와 우리 가족들은 우리 속도에 맞게 걸어갈겁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내 저 세온이, 딸아이가 모여 치킨을 시켜 먹었어요. 그때 아내가 사각형을 그리면서 요만큼 행복하다고 말해요. 세온이와 저도 요만큼 행복합니다. 직원들한테도 요만큼 행복하자고 말합니다.”

아빠와 아들은 동반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날아온 아내, 딸과 만나 완전체가 됐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결판!!

*<내 삶의 쉼표>는 개인 삶에 활력을 주는 취미활동 등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을 위한 코너입니다. 참여하고 싶거나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hahaha@hitnews.co.kr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헬스케어 분야 종사자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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