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6년 마감하는 이정희 유한양행 사장
"유한양행의 북극성은 언제나 고 유일한 창업주 경영이념"

사실상 임기 6년의 대표이사를 마친 유한양행 이정희 사장은 "시원섭섭보다 숙제를 마쳤다는 기분이 더 든다"고 했다. 

1978년 스물 일곱 청춘에 입사해 일흔에 퇴임하는 그에게 6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바쁜 세월"이었고, 성과는 달콤했다.  

출근하는 아침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고 다짐하기를 6년, 그는 2015년 대표이사 시장에 취임하며 약속했던 "R&D를 통해 유한양행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단, "오늘은 화를 내지 말자"는 다짐은 매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고 했다.

이 사장은 재임기간 영업활동을 통한 매출과 영업이익 측면에서도,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신약 연구개발에서도 굵직한 기술수출을 이뤄냈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2020년 영업이익 843억원과 이의 두배 가량되는 1556억원의 기술료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 사장은 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일 감옥'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25일 이사회에서 '기타 비상무 이사'로 선임돼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 경영을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을 담고 있는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경영이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이 사장의 역할이 필요해 진 것이다. 

유한양행은 아주 오래전 故 유일한 창업주의 정신으로 발전해와 이미 ESG 경영에 근접했으나, 거버넌스 부문을 더 강화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지금까지 유한은 대표이사 사장이 이사회 의장을 맡았는데, 이는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아킬레스건이었다.

이 사장이 이사회의장을 맡는 경우 차기 사장과 함께 유한의 신약개발 R&D를 위한 오픈이노베이션 버전 2(Ver.2)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19일 오전 이 사장과 커피를 마시며, 6년만에 아주 다른 면모의 회사를 만든 요체가 무엇인지 엿보았다. 

이정희 사장은 임기 6년 동안 선배 임직원들이 축적한 역량 을 바탕으로 오픈이노베이션 기반 연구개발에 초집중 한 결과 기술수출과 함께 폐암치료 항암제 렉라자를 품에 안았다.
이정희 사장은 임기 6년 동안 선배 임직원들이 축적한 역량 을 바탕으로 오픈이노베이션 기반 연구개발에 초집중 한 결과 기술수출과 함께 폐암치료 항암제 렉라자를 품에 안았다.

 

임직원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는 리더의 첫 메시지는 중요합니다. 2015년 3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셨을 때 첫 말씀이 궁금합니다.

"처음으로 임원회의를 했을 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법인 통장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장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던지고, 임원들이 대답하는 형식이었죠. 사장으로서 내가 임원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회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지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두 가지로 압축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 사장님의 의중을 담으셨군요.

"그렇죠. 별들이 반짝이는 칠흑같은 밤 하늘을 보여주는 사진이었어요. 임원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를 말해 보라고 했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갔어요. 제가 그 사진을 통해 꼭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밤 하늘의 좌표가 북극성(Polaris)인 것처럼 유한양행의 북극성은 창업주 故 유일한 박사가 정립한 경영이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 한 겁니다. 우수 의약품 생산, 성실한 납세,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은 유한양행에게 불변의 북극성인 것이죠. 1926년 창업이래 이 경영이념은 시대에 알맞은 구체적 행위로 실천됐지만 본질적으로 바뀐 적은 한번도 없었거든요."

 

일단 분위기는 잡혔을 것같습니다. 나머지 어떤 이야기로 이어가셨죠?

"취임 당시 유한양행 법인통장에 5000억원이 있었어요. 전임 사장님들과 임직원들의 노력으로 차곡차곡 쎃아올린 소중한 자금이었죠. 임원들에게 질문했어요. 이 5000억원의 주인은 누구냐고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당연히 유한양행 지금 아니냐, 주주들의 자금 아니냐, 임직원들의 자금 아니냐 등 의견들이 엇갈렸어요."

 

누가 뭐래도 주식회사 유한양행이 주인 맞는데요. 오답인가요?

"네. 제 기준으로는 오답입니다. 유한양행의 자금이라는 답변은 표면상 맞는 말이지만 저는 달리 보았어요. 그 돈의 참 주인은 은행인 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맡겨 놓고 이자수익만 보았지 주인으로서 한일이 없었잖아요. 은행들은 이 5000억원을 가지고 다양한 금융상품을 만들고, 투자를 하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었으니 그들이 진정한 주인이죠. 저는 이 돈을 적극적으로 쓰기로 했고, 임원들 앞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5000억 모았으면 1조를 만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하하. 제가 유한양행 경영이념 이야기를 먼저 했잖습니까. 우수 의약품 생산, 성실한 납세,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실현하는 기업이 되려면 이 5000억원과 기업의 인적자원을 결합시켜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그게 회사 이념에 맞습니다. 저는 제약회사에 걸맞는 미래가치는 단언컨대 연구개발(R&D)을 통한 신약개발로 글로벌 연구개발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임원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유한양행은 앞으로 이 길로 간다는 사장의 의지를 강하게 표명한 것이죠."

 

길을 정하시고 난 뒤 파이프라인 창고를 들여다 보시니 어땠나요?

"암담했어요. 제가 영업출신이니 자세히 모르잖아요. 해서 역량이 높은 남수연 중앙연구소장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였죠. 제 철칙 중 하나는 아는 척하지 말고 잘 아는 사람에게 믿음으로 권한을 이양하는 거에요. 함께 들여다보니 10년째 200억원 가량 투입된 과제도 하염없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심하게 말하자면 목적성없이 해야하니까 하는 거였죠. 비용과 세월을 잡아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드롭을 결정했어요. 일하는 방식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일하는 방식에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셨나요?

"제일 큰 문제는 조직원들이 일이 무엇인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늘상 해오던 일을 자신이 해야할 일로 인식하게되면 창조적으로, 혁신적으로 일하는데 무관심하고 일들을 붙잡고 있게 되는 겁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휴대폰을 처음 만들었을 때를 창조라고 한다면 여기에다 카메라 기능을 넣고, 컴퓨터 기능을 넣는 것은 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직원들의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하셨나요?

"창조든 혁신이든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해 진행하는 일은 깔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결과를 내든지, 중간에 아예 접든지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앞으로 일을 뭉개고 있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하는 것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해를 하는 편이지만,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미루는 태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화를 냈어요.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일까지 연쇄적으로 늦추게 만드니까요."

 

유한양행은 내부 경쟁으로 성장한 인물이 사장에 오릅니다. 사장을 꿈꾸시는 분들에게 어떤 말씀해주고 싶으세요?

"아, 저는 경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선택받는 것이죠. 전임 사장과 대주주, 사내 임직원들로부터 선택받는 것이죠. 같은 레벨의 세 유형의 인물이 있다고 쳐보죠. 첫째, 능력이 탁월한 사람. 둘째, 업적도 못미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 셋째, 업적은 탁월하지는 않아도 주위와 토론하고 격려하며 회사 목표대로 가는 사람. 누구봐도 둘째는 탈락돼야 겠죠? 그러면 첫째와 셋째가 남는데, 조직에선 누구를 선택할까요? 개인이 잘 한다고 한들 조직의 여러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일 뿐이죠. 조직이 역량을 발휘하도록 주변을 받쳐주고, 일으켜세워주는 인물이 리더감 아닌가요? 전, 이런 관점으로 우리 임직원들이 일했으면 했어요."

 

암담했다고 하셨던 연구개발 쪽 이야기 좀 더 해보죠. R&D와 어떻게 친해지셨어요?

"지름길이 어디 있겠어요. 사장으로서 당연히 친해져야만 하는 거잖아요. R&D는 연구원들이 하는 것이니까 제약바이오협회 이사장을 하던 해에 연구소로 매주 1회 씩 출근해서 풀타임 근무를 했어요. 처음에 연구소에 갔을 때 연구원들은 절해고도(絕海孤島)에 있는 것처럼 소외감을 느꼈어요. 유한양행 직원인지, 회사 조직이 맞는지 싶을 정도였어요. 이것부터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고 금요일 오전 협회, 회사근무 3일로 빠듯한 가운데서도 거의 매주 연구소로 가서 연구원은 물론 팀과 면담하며 사기를 진작시키고 개선점, 지원 방향을 찾았어요."

 

절해고도에 있는 사람처럼 고독했던 연구원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던가요?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이제 연구원들은 유한의 선봉에 서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아니면 회사가 큰일 나는 것처럼 자부심이 넘쳐 납니다. 이건 모든 사장들이 바라는 바일거에요. 제가 영업출신인데도 6년 동안 전국 30여개 지점 가운데 절반 밖에 가지 못했어요. 한번 이상 간곳은 없어요. 무엇보다 약품본부장을 믿었고 믿음대로 잘해냈으니까 연구를 일으키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죠."

 

이정희 유한양행 사장 6년 재임 중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성과를 거둔 라이센스 아웃(L/O) 현황.
이정희 유한양행 사장 6년 재임 중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성과를 거둔 라이센스 아웃(L/O) 현황.

 

얼마전 허가 받은 항암제 렉라자도 그렇고 바이오벤처들과 협력을 많이 하셨잖아요. 이같은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외부에서 궁금해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잘 아는 사람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것이 사장의 덕목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남수연 소장이 어느 벤처에 좋은 파이프라인이 있다고 보고하면 남 소장과 투자 담당 임원이 먼저 상의하라고 합니다. 두 분이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투자와 기술의 관점에서 상의를 마치고 나면 셋이 모입니다. 셋의 의견이 모아지면 일은 빛의 속도로 처리 했어요. 의사결정의 권한은 제가 50%, 나머지 두 분이 각각 25%씩 가졌던 셈이죠. 만약 투자 금액이 30억 미만이면 사내 듀 딜리전스(DD)를 하고, 이를 통과하면 1주도 안돼 바로 송금했습니다. 우리도, 파트너도 기회비용은 소중하잖아요."

 

유한은 주인이 없어 의사결정이 늦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다릅니다.

"절대 그렇지 않죠. 유한양행은요, 사장이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예를들어 자본금의 10%에 해당하는 투자금액이라면 사장 전결로 처리 가능합니다. 바이오벤처나 파이프라인 도입 같은 경우 사내 전문가와 협의해 좋다고 의사결정을 했지만, 만약 투자금액이 자본금 10%를 넘게되면 이사회(10여명) 안건으로 상정해 최종 의사결정을 묻습니다. 이 때도 의사결정은 신중하되 빠르게 진행했어요. 유한의 이사회는 아주 활성화돼 있어서 통상 3~4시간 걸립니다. 30분 정회없이 이사회를 마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교육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시다 들었어요.

"그런 편이죠. 취임당시 연간 교육비가 2~3억원이었는데, 최근에는 20~30억원으로 10배 가까이 늘었어요. 역동적인 조직이 되려면 순환 근무도 필요한데 문제는 해외 영업이었죠. 영어를 잘하는 직원이 없으면 해외 영업 인원은 움직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5주간 합숙 영어 교육도 시키고 그랬죠. 3~4년 해서 안되면 임원 심사에서도 제외시켰어요. 그랬더니 사장도 못하면서 임원들만 시킨다고 불평도 들었죠."

 

영문과 나오셨잖아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국내 영업 쪽에서 십수년 있다보니, 다 잊어버리고 잘 안되더라고요."

 

몇 년전 약품사업본부장과 경영관리 본부장을 맞바꾸셨잖아요. 통상 리스크가 큰 관계로 이렇게 하기 쉽지 않을텐데,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셨죠?

"조직을 끌어가는 인재를 키워내려면 회사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약품사업 본부장을 하다가 갑작스레 경영관리본부장이 된 분에게는 재무제표 부터배우도록 했고, 약품본부장이 된 분에게는 매출 5~10% 감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맡겼죠. 그런데 실제로 조직이 보필하기 때문에 리스크는 충분히 감당이 됩니다."

 

유한양행의 R&D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될 것으로 전망하시나요.

"임기 6년을 마치는 입장이니 다음 사장님께서 잘 이끌어 가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제 생각으로는 오픈이노베이션 버전 투(Ver.2)로 발전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들어 사내벤처 활성화 같은 것인데, 중앙연구소장이 일종의 CEO 역할을 해서 배정받은 R&D 기금으로 벤처를 만들고 스핀 오프해서 유한양행과 협력하며 발전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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