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같은 전문경영인이 일군 혁신

2015년 3월. 막 취임한 이정희 대표이사 사장에게 맡겨진 장수 기업 유한양행은 '현재가치가 남다른' 회사였다. 내부에서 승진했던 CEO들이 창업주 故 유일한 박사의 기업 이념을 나침반 삼아 매출, 영업이익, 순이익을 균형잡히게 성장시켜 놓은 덕분이었다. 사업보고서에 나타난 2014년 매출은 1조174억원, 영업이익은 744억원, 순이익은 909억원이었다. 오랜 성과 누적으로 보유 자금력도 단연 업계 최고였다.
  
매출 1위, 보유자금 1위의 회사는 어느 대표에게나 선물같은 회사였겠지만, 이정희 대표는 기쁨에 앞서 고민이 더 많았다고 한다. 회사 규모에 견줘 신약 연구개발(R&D) 열망과 투자가 느슨하고, 매출의 실질면에서 다국적 제약회사 품목 비중이 높다보니 업계에 '유한양행 디스카운트'가 자리잡고 있었던 탓이다. 더욱이 주변에선 한 단계 아래로 여겼던 한미약품이 자사 연구소 기반 신약 파이프라인을 조단위로 수출하며 약진 중이었다.

유한양행이 투자한 아임뉴런 개소식에 참석한 이정희 대표(위)와 2015년 취임 후 사업보고서에 나타난 유한의 현재가치를 보여주는 지표들.
유한양행이 투자한 아임뉴런 개소식에 참석한 이정희 대표(위)와 2015년 취임 후 사업보고서에 나타난 유한의 현재가치를 보여주는 지표들.

'글로벌 신약기업을 지향점'으로 정하고 '풍부한 현금으로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이 대표가 마침내 결단했다.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약 R&D를 강화하기로 했다. 다만 인하우스(in-house) 연구소 중심의 독자 연구개발 방식 대신 오픈 이노베이션을 선택했다. 독창적 기술을 갖고 모험적으로, 속도감있게 도전하는 바이오벤처들에게서 그는 희망을 보았다. 벤처에 투자를 하거나, 신약 후보물질을 사들여 개발 단계를 높이는 것이 유한양행 다운 방식이라 판단했다. 

'R&D 투자→글로벌 성과→재투자'라는 선순환 궤도의 가치를 믿은 이 대표는 2014년 580억원이던 R&D 투자금을 2020년(3분기까지) 1246억원까지 높였다. 매출액R&D비율은 5.7%에서 10.8%까지 가파르게 끌어올렸다. 끌어올렸다기 보다 투자할 파이프 라인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이 기간 벤처기업들의 양봉업자처럼 직접투자를 하고, 파이프라인을 들여온 결과 14개였던 2015년 혁신신약 파이프라인 과제수는 2020년 30개로 늘어났다. 최근 국내 31호 신약으로 허가받은 폐암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는 유한양행 화단에서 '먼저 피어나는 꽃'이다. 

근래 유한양행이 벤처에 투자하고, 파이프라인을 들여오고, 임상개발을 통해 기술 수출(5건)을 하는 것은 '유한양행이 유한양행했네'처럼 자연스럽다. R&D 투자를 하고, 투자수익을 거둬 회사 가치를 향상시키는 'R&D 경영'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얀센에게 기술수출한 레이저티닙의 경우 기술수출계약금(5000만달러)외 임상개발 마일스톤으로 1억달러 이상 벌어들였다. 레이저티닙이 신약 단계로 점차 진행되고 있다는 시그널이자, 유한이 얀센에서 추가로 받을 돈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한장의 이미지에는 이정희 대표의 6년간 R&D 오픈이노베이션 흔적과 성과가 그대로 녹아있다.(자료, 유한양행 2020년 10월 IR자료 중)
이 한장의 이미지에는 이정희 대표의 6년간 R&D 오픈이노베이션 흔적과 성과가 그대로 녹아있다.(자료, 유한양행 2020년 10월 IR자료 중)

그런가하면 이 대표는 유한양행 R&D 화단에 다른 기업은 하지않은 '뇌질환 치료제의 꽃씨'도 심어 놓았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뛰어 넘는 사회적 혁신 플랫폼으로, 성균관대, 아임뉴런바이오사이언스와 함께하는 CNS R&DB 생태계 구축 협력사업이다. CNS 연구센터 설립을 비롯해 ▷공동연구 및 신약개발 협력 ▷CNS 신약과제 확보 ▷기초뇌과학 기술분야 학과신설 추진 등 산학융합 뇌질환 R&BD 생태계 구축사업으로 그는 높이 멀리 날기위해 사회적 투자를 했다.

유한은 이에 앞서 연구소기업 아임뉴런바이오사이언스(대표 김한주)에 60억원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하고, 뇌혈관 장벽(BBB) 투과 약물전달 플랫폼 기술을 이용한 3개의 뇌암·뇌질환 분야 프로그램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기초의과학 기술로 뇌질환 분야의 게임체인저가 될만한 혁신신약 개발을 목표로 세울만큼 유한양행의 R&D 경영은 자신감이 넘치고 진일보하고 있다.  

한번 결심하면 흔들리지 않는 이 대표와 장기간 신념으로 버텨야 가능한 신약 개발 사이의 궁합은 잘 맞는데, 정작 이 대표의 경력은 R&D와 깊은 연관성이 없다. 영남대 영문과를 나와 1978년 입사한 이 대표는 영업, 유통, 마케팅, 홍보, 경영관리 등 기업의 주요 보직에서 일하다 CEO가 됐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현 시점에서 기업의 미래에 제일 필요한 것을 찾아내 초지일관함으로써 성과를 냈다. 2월말이면 6년(3년씩 연임)의 대표이사 사장직에서 물러나는 그는 100년 기업(2026년)을 눈 앞에 둔 유한양행 역사에서 '기업가치의 변곡점'을 만들어 낸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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