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백수 맹호영 통신 간헐적 연재 ⑥ 마음에 남는 리더들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가라

맹호영  전 한국사회보장정보원 기획이사.
맹호영  전 한국사회보장정보원 기획이사.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살아라. 삶이 요동치고 생각이 심난해지면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존경하는 보건의료단체장들을 떠올리곤 한다. 일상의 루틴이 뒤집혀지고 모든 것이 갈팡질팡하는 요즘 새삼스럽게 뛰어난 리더십으로 자신이 이끄는 단체의 미래를 만들어갔던 단체장들이 그립다.

보건복지부에서 30년 넘게 공직생활을 하며 훌륭한 많은 분들을 만났다. 거의 대부분 보건의료계의 리더로서 국민건강증진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고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에 감동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단체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궁극적으로 국민건강증진 목표를 향해 노력을 집중했다.

직접 겪어본 단체장들의 휼륭한 비전 제시능력과 확고한 철학을 통해 꿈꾸던 단체 목표를 하나씩 채워가는 모습을 경험하였다. 엘리트 회원들로 구성된 단체인만큼 회원들의 요구가 워낙 다양해서 합의점 찾기가 어렵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백가쟁명식으로 토론하고 경쟁하면서 절충점을 찾는 이상과 현실의 갭 차이를 파열로 가지않고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데 뛰어나셨고 또한 헌신적이었던 몇 분의 단체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협회를 대표하는 단체장인 만큼 공통적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명확한 방향과 철학을 가지고 비젼을 제시하였고 그 비젼을 실천해나가면서 그 단체가 꿈꾸던 미래가 조금씩 실현시켜 가는 것을 보았다.

단체장들은 대체적으로 위기상황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과 내공을 갖추었고 단체장들 공히 공통점은 글로벌을 지향하고,회원 경쟁력을 강화하며, 대국민소통 활성화를 도모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와 그 미래 실현을 위해 촘촘하게 실행계획를 세워 추진해나가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새로운 간호 100년 시대" 연 간호사협회 신경림회장 

간호사협회장을 여러번 역임하고 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Global citizen, Global nursing. 한국 간호를 세계속의 K-Nursing이 되고자 국제화에 애쓰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체구는 크지않지만 생각은 거인이었던 신경림 회장은 2015년 한국에서 세계 간호사대회를 개최하여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하여 2014년 메르스 공포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데이터  32대 간호협회회장(08.2∽10.2), 33대(10.2∽12.2), 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장(11.5∽12.2),19대국회의원(12.5∽16.5),37대,38대 간호협회회장(18.2∽22.2)

2015년은 한국이 메르스(중동호흡기 증후군) 감염병 전파로 곤혹을 치른 바 있다. 중동지역에서 발생된 메르스 질환이 한국에 전파되어 빠른 속도로  한국내 여러지역으로 확산되어 혼돈 속에 빠졌다. 2015년5월 바레인에서 귀국한 첫 번째 감염자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으로 확인되어 정부에서 감염확산 금지 비상 조치하였고 이후 2달간 사망자 38명 발생으로 한국을 공포로 몰고 가다 최종 7월28일 종식 선언을 했다. 

이 메르스로 한국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고 외국사람들도  메르스여파로 한국에 오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 신경림회장이었다. 한국내 감염 오명을 빨리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보건전문가가 한국에 많이 와서 안심감·안정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2015년 6월 전세계 간호사들이 한국 서울에서 국제간호사대회를 개최하여 135개국 12,000명이 간호사 참석하였다. 메르스 감염병 위기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렇게 많은 간호사가 참석한 것은 그 이전부터 국제간호사 조직을 통해 사전 협력을 도출한 결과였고 특히 2014년 가을에 국제간호사 협회의 실질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미국 간호사협회와 캐나다  간호사협회를 직접 방문하여 협조를 도출한 결과이다. 

신 회장의 명쾌한 논리와 추진력으로 세계간호사대회의 준비를 차질없이 진행하고 노력한 결과로 해석된다.

나는 당시 복지부과장으로 신경림국회의원을 모시고 뉴욕에 있는 미국간호단체, 오타와 및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간호협회를 방문하여 협조를 당부 하고 간호사단체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신 회장은 국회의원 신분이어서 의전에 많이 신경써야했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하면서 열정이 넘치는 에너지와 지치지 않는 대외활동에 열중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한국이 변방이 아닌 주역으로 활동하는 리더십을 목격할 수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 출장기간 내내 다음해(2015년)세계간호사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꼼꼼하게 체크하고 확인해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캐나다 주한대사관까지 방문하여 캐나다간호사협회가 한국 방문에 어려움이 없도록 협조 당부드리는 철저함에 많이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철저한 사전 준비로 2015년 세계 간호사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메르스 여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보건의료 선진국임을 다시 한번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회장은 새로운 간호 100년의 초석을 만들기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민에게 친근한 간호사 이미지 창출 등 간호사의 전문적이고 헌신적인  돌봄서비스를 국민이 권리로 인정받고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였다. 초고령사회로 진입된 현재 의료환경속에 급성기 질환과 치료중심의 보건의료패러다임으로는 한계가 봉착하여 이제 만성기질환 예방 및 간호돌봄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WHO(세계보건기구)마가렛 사무총장은 2015년 세계간호사대회에서 간호사, 잠자는 거인에서 깨어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당찬 말씀이 기억이 생생하다. 초고령사회의 인구구조와 만성질환에 포위되어 현재의 건강보험제도, 의료제도로는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에 한계가 있어 새로운 미래보건의료환경에 맞는 제도역설에 동감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지지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보편적 건강권 보장과 고령사회 돌봄 전달체계 구축을 위해 현행 의료법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하고 있다.

 

국민 바라보자한 약사회 원희목 회장... 복지부에 큰 영향력

약사회에서는 대표적인 약사회 리더로 민관식장관,김명섭회장,원희목회장이 많이 회자된다.

 데이터  33대, 34대 약사회장(04.3∽08.5),보건의료인국시원장(07.6∽08.5),18대국회의원(08.5∽12.5).

원희목회장은 공직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직 내부의 이해관계와 어려움을 미리 계산하여 협상에 반영, 늘 한발 앞서가는 의견을 제시하는 원회장을 복지부 내부에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복지부 내부출신으로 복지부장관에 오르신 최선정 장관은 사석에서 "내가 원희목 위원장에게 빚진 게 있어. 갚을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하셨다. 안타깝게도 최 장관이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빚을 청산하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된다. 원희목 회장이 늘 주장하는 보건의료정책은, 이해단체간 합의사항은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주장에 깊히 동감하셨다.
 
1994년 한의사와 약사간에 한의약조제권 분쟁이 발생되었을 때 강남구약사회장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였고, 2000년 의약분업 당시에는 약사회 총무위원장으로 의료계·약계·정부간 의약정 회의체에서는 크게 활약하였다. 어렵게 의료계·약계·정부가 타협하여 의약정 합의문을 작성하는 데 초기에 난관이 많았다. 의약정 합의문 첫 문장에 의약정은 국민앞에 사과하고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문구가 첫 문장 합의문에 게재하는 것을  두고 의약계는 사과한다는 것은 잘못을 시인한 것으로 이해되어 합의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원희목 당시 약사회 총무위원장이 국민앞에 마땅히 사과할 내용을 사과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반영되었다.  

약대 6년제 학제연장 법안 개정 당시에는 약사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학제 연장에 대해 의료계는 불편을 표시하였고 의료계와 약계가 이견차가 컸던 만큼 공청회를 개최하여 의견을 조정코자 하였다. 최종 공청회장에 원회장은 간이식을 받고나서 몇주 안된 상태로 절대 안정을 취할 시기에 공청회에 약사회장으로 참석하였다. 간이식의 중환자 상태를 잘 이해하는 의계  지도자들은 원회장의 공격을 자제하였다. 

1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제약산업육성지원법 발의 제정하여 제약산업을 신성장 동력산업 핵심으로 육성발전시켰다. 원회장은 상대방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원회장 시절 회원들이 원회장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회원들이 많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의사협회 허창회 회장,  한의학 새로운 역사 열어  

26대 27대 회장을 지낸 허창회 한의협회장(93.4∽96.1)은 한의학 바로 세우기 등 한의계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도전이 없으면 학문의 발전도 없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은 걸림돌이다. 이를 개혁하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허회장은 뛰어난 달변가로 사자 후같은 음성으로 집회시위에 참석한 좌중을 이끌어나갔다. 

복지부 내에 국장급 조직의 한의약정책관을 신설하고, 국립한의학연구원 및 한의약육성법을 제정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한의사협회 회장으로 집행부를 한의대 6년 졸업자 중심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한의사협회 시대를 열었다.

 데이터  1964년 한의대 6년제 학제연장 → 2009년 약대 6년제 학제연장결과 향후 예측 가능 

「약사법시행규칙」 조항에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야한다." 이 조문을 삭제한 것을 계기로 한의계는 약사에게 한약조제를 허용하는 조항으로 해석하여 크게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한약조제권 분쟁이 발생되었다. 당시 한의원 수익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던 한약조제권 취급에 대한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생존권 위협받는다고 판단하고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연일 복지부 규탄대회를 열고 사회문제화시켜 나갔다. 당시 복지부장관을 고발하고 한의대생들은 수업거부 등으로 이어졌다. 

허 회장이 주장한대로 정부의 한의약 편향된 정책으로 인해 늘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는 한의계 문제를 정부정책 주요 사항으로 유도하는데 어느정도 성공하였다.

1993년 한의약분쟁으로 허창회 회장은 과천청사 앞 운동장에서 늘 정부에 대한 성토 발언으로 시작한다. 거의 1년간의 복지부 항의집회가 열렸으며 정부는 약사법 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운영하여 한약사제도를 신설하는 것으로 1994.1월 법 개정하여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1995년 약사의 한약조제범위를 정하는 한약조제지침서 규정집을 만드는 과정에 또 한번 충돌이 있었다. 

나는 복지부 약무정책과에 근무하는 업무 담당자로 집회가 열릴 때마다 집회현장에 참석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리하고 요약보고하는 역할로 누구보다 열심히 듣고 메모해서 허회장의 생각과 계획을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젊은 한의사들을 이끌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창출하는 일에 임해서는 번뜩이는 기지와 뚝심으로 어려움을 훌륭하게 극복한 허 회장에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의계 6년제의 대표주자로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한의계를 재평가해서 현상 그대로 올바로 평가해주기를 요구하였다. 허회장의 철학과 꿈꾸는한의계의 미래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상황판단능력, 순발력,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조직운영 능력에 있어 허회장의 내공에 대해 감탄  하였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과 제도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시대에 앞서가는 세계속의 한의학" 슬로건을 창안하고 적극적인 공세로 국민에게 이해시키는 내공이 대단한 분이었다. 한의계 미래 비젼과 철학을 새롭게 제시하고 늘 한발 앞서 한의계 미래를 제시하였고 한의학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기억된다.

 

치과협회 윤흥렬 회장 "글로벌 치과생태계" 조성해 경쟁력 강화 

 데이터  21대 치과협회회장(90.4∽93.4), 대한세계치과연맹회장(02.9∽04.9), 아태치과연맹회장(02.4)

'설탕 덜 먹기운동'과 자일리톨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자연치아 아끼기 운동' 등 국민속에 다가가는 생활속 치과정책 수립이 인상적이었다.

넉넉한 체구에서 뿜어나오는 늘 따뜻하고 친화력이 넘치는 치과단체의 맏형 역할을 아주 잘하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치과단체인 치기공사,치과  위생사,치과기재단체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이해당사자들과의 스킨십으로 치과단체를 화합으로 잘 이끌었던 기억이 새롭다.

유머와 재치가 있어 치과단체행사마다 좌중을 이끌고 비젼 제시와 실천행동계획까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이 기억이 생생하다. 글로벌 속에 한국 치과 생태계를 조성할려고 동분서주하였던 윤회장은 국제 메머드급 치과학술대회를 여러번 유치하였다. 

1989년 아태치과회의, 1997년 세계치과총회, 2002년 아태치과회의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 치과영역을 확대하면서 늘 치의학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회원들 학술연마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국제사회에서 한국 치의학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느 한사람의 독주적 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변의 치과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모두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씀은 늘 생각이 난다. 치과 영역의 인적자원 개발 및 후진양성에서,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물을 적극 발굴하고  장단기적으로 체계적인 통찰력 있는 치의학 후배 양성에 관심을 두셨다.

남북 치과협력사업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치과의료지원사업, 치과협회차원의 대북한 주민진료를 활동하는 방안도 제안하였고, 치과 의료도서지원 북한 치과의료수준 향상을 위해 북한학자와 의료기기 기술자 초청교육 등 다양한 제안을 하셨고 실천하셨다. 

치과협회 회장 임기제(3년)를 도입하여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우리나라 치과의사협회장을 역임하고 2003. 9월부터 2년간 세계치과의사연맹 수장 으로도 활동하였다. 국제치과의사연맹 회장후보로 입후보하여 유럽의 강력한 후보 벨기에 미셀아덴을 상대로 압도적지지 약 70% 지지를 이끌어 낸 만큼 국제사회에서 인맥도 넓고 다양했다. 국제치과연맹 회장 재임기간중에는 구강암 퇴치, 금연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도자 한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그가 속한 사회, 세계를 얼마나 변화시키는지를 잘 알고 있는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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