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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의 선택, 그리고 외부의 따뜻한 시선

바이오텍 사업개발(BD) 팀원으로 일하던 시절, 자사 신약의 가치평가를 하는데 영 껄끄러운 결과가 나왔다. 신약을 기술수출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자 아무리 변수를 조정해 봐도 벌 돈이 쓸 돈보다 적었다. '팔아봤자 적자니 포기하자'는 말을 적당히 다듬어 임원진에 보고하자, "그럴 리 없으니 흑자가 나올 때까지 재분석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되돌아왔다.

매번 이런 식이니, 20개에 육박하는 파이프라인에 '개발 중단' 판정을 받은 신약은 1개도 없었다. '우리가 무슨 약장수냐고, 내부 보고서만 보면 다 블록버스터 신약이라고' 업계 동료들에게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지던 기억이 있다. 몇몇은 "우리도 그런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그럴수록 씁쓸한 마음은 깊어져만 갔다. 정말이지 이 업계는 포기란 걸 모르는 것 같았다.

해외 신약 개발 소식을 모니터링하다 보면, 빅파마(Big Pharma)들의 개발 중단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노바티스는 지난 3개월 동안 3개의 파이프라인에 대해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화이자는 지난달 7개 파이프라인을 포기했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도 같은달 14일 6개 파이프라인을 정리했다.

근래 들어 도드라지는 행보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글로벌 제약사들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파이프라인을 정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알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왜 중단했는지, 중단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아낀 비용과 시간을 어디 재투자할 것인지 낱낱이 밝힌다. 그들에게 포기는 전략이다.

포기한다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결정일 수밖에 없다. 제때 포기하지 않으면 이중고(二重苦)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망 없는 파이프라인에 수십억, 수백억을 소진하며 돈줄이 마르는 게 첫 번째 고통이요, 마른 돈줄 때문에 후속 파이프라인까지 중단되는 게 두 번째 고통이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신약을 '개발 안 하는' 것임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길 바라면서 조심스레 주장해 본다.

하지만 한국 신약 개발 시장에 '포기도 전략'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았는지 생각해 보면, 쉽사리 그렇다 말하기 어렵다. 회사와 투자자 모두에서 그렇다. 적지 않은 수의 회사가 가망 없는 파이프라인에 '못 먹어도 고(Go)'를 외친다. 혹은 알리지 않은 채 슬그머니 개발을 멈춘다. 회사 본인들부터, 그리고 투자자들이 포기와 실패를 동의어 취급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때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파이프라인은 고꾸라지고, 몰래 브레이크를 건 파이프라인은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구조다.

최근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가 자사 2개의 파이프라인에 대한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2023 세계폐암학회에서 임상 후속 데이터까지 발표했던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신약 후보물질 'BBT-176(개발코드명)'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부끄럽고 속 쓰린 결정이었을 수 있다. 포기를 실패라고 여겼다면 말이다.

하지만 회사는 공시에서 끝내지 않고, 보도자료까지 당당히 내보냈다. 그 내용도 충실했다. 어떤 파이프라인을 왜 포기했는지, 포기한 대신 어디에 재투자해서 어떤 전략을 펼칠 것인지 담담히 적었다. 투자자들에겐 아쉬운 소식일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좋은 소식으로 들렸음을 솔직히 밝힌다. 적어도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는 포기를 전략으로써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다.

사실 더 많이 보고 싶다. '개발을 포기했다, 파이프라인을 정리했다'는 소식이 국내에서도 더 많이 들렸으면 한다. 실패를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전략적 용단을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 기업들에게 제안해 본다. 포기하고 덜어내자. 왜 덜어냈는지 설명하자.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라고 당당히 말해주길 바란다.

우리 언론계에도 제안한다. 기업의 개발 중단 소식에 우려 섞인 시선만을 건네지는 말자. 왜 포기했는지, 포기한 대신 무엇에 집중할 것인지 조명해 보는 건 어떨까. 떠밀려 포기한 것이 아닌 이상, 기업이 내보이고 싶어 하는 복안은 작든 크든 있기 마련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 투자자들도 포기를 희소식으로 여겨줬으면 한다. 포기도 전략임을 투자자들도 인정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회사가 용기를 내서 자신의 미숙함을 인지하고, 그 이유를 알리고, 후속 전략을 내놓을 수 있다. 2보 전진할 수 있다면, 1보 후퇴하는 것은 언제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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