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승소 시 정당한 합의...제약사 이기면 효력 부인 가능성 있어

어느 집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환절기는 특히 상비약의 중요성을 깊이 체감하는 계절이 된다. 아데노 바이러스가 한참 유행이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나 4살이 된 둘째가 어느새부턴가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괜찮으려니 했는데, 꼭 주말 밤에만 증상이 심해지고 열이 나는 건 어느 집 아이든 예외가 없다.

열이 40도까지 올랐지만 주말에 문 연 소아과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하루 이틀 정도는 일반의약품 해열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온몸이 불덩이였다가 해열제를 먹고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면 새삼 이런 응급의약품을 만들고 공급하는 제약사의 역할에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얄궂게도 바로 그 다음 주 주중에, 주말 내내 먹인 어린이 해열제 일부에서 진균이 초과 검출되어 식약처가 사용 중지 명령을 내렸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별다른 문제야 없었겠지만서도 부모된 자로서 불안한 마음에 계속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결국 제조사가 문제된 제조번호의 롯뜨 외에도 생산량 전체를 회수하고 소비자들에게 의약품 구입비용을 환불해 주겠다는 기사까지 접할 수 있었다.

 기사 참고  챔프 전량 회수... 이번에도 '챔프급' 보상 이어질 듯

경영상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유사한 사건 전개를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과 함께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잔뜩 썩였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이물질 검출 이후 사용 중지, 환불 및 교환으로 이어지는 절차가 있었고, 그 이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공단’)이 재처방·재조제에 들인 행위료는 누가 부담할 것이냐는 쟁점이 있었던 사건, 바로 발사르탄 구상금 손해배상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사용 중지처분 이후 공단이 구상금을 고지하였는데, 오히려 식약처가 발사르탄을 복용한 환자의 발암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중간 발표를 해 버려 소송 진행이 굉장히 곤란해지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쨌든 언론에도 보도된 것처럼 1심 재판부는 법조계의 대다수 예측을 뒤엎고 제조사들의 제조물 책임을 인정한 다음 공단에 건보법에 따른 구상권을 인정하여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을 내렸고, 현재는 2018년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NDMA의 검출 가능성이 있었는지 여부 등에 관한 쟁점을 가지고 2심이 치열하게 진행중이다.

 기사 참고  발사르탄 불순물 정부-제약 항소심 내년 1월 판결날 듯

발사르탄에서의 NDMA 검출과 위 1심 판결은 제약업계에 다양한 규제와 법적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식약처는 품목허가 단계에서 유전독성 평가제도를 도입하였고, 복지부는 공단이 수행하는 의약품 협상에 불순물 품질관리에 관한 사항을 넣도록 하여 제약사들에게 품질관리의무를 부여하였으며, 공단은 위 1심 판결을 근거로 라니티딘과 니자티딘 등 발사르탄 이후에 발생한 불순물 검출 의약품에 대한 구상금을 추가로 고지하였다.

하나하나가 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는 쟁점이겠지만, 필자가 본 기고에서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부분은 소송 이후 전개될 품질관리의무, 특히 공단과 제약사 간 협상에 따라 제약사가 부담하기로 한 품질관리의무의 향방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공단과 제약사 간 협상은 비밀유지의무가 적용되기 때문에, 품질관리의무가 어떤 내용으로 규정되는지 제3자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동안의 보도를 통해서 추측해보자면, 보험당국은 발사르탄 사건을 기화로 보험약제에 대해 불순물 리스크를 제약사 측에 이전하고자 하는 방안을 강구했던 것으로 보이고, 당시 건강보험 요양급여기준 규칙 개정을 통해 제네릭에 대해서도 협상을 통해 합의를 남길 수 있는 기전이 마련되자 표준합의서를 통해 품질관리를 제약사 측의 의무사항으로 하는 합의절차를 밟아온 것으로 보인다.

위 발사르탄 소송이 최종적으로 공단의 승소로 끝나게 된다면 제약사들이 합의를 통해 부담하기로 한 품질관리 의무는 일응 정당한 합의로 보여질 것이고, 추후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다툴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이미 합의도 한 사항이고 합의 내용을 번복할만한 근거도 충분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제약사 측의 승소로 결론이 난다면, 제약사들은 추후 품질관리의무에 따른 부담이 발생할 경우 기존에 맺은 합의서의 효력을 부인하거나 책임을 감경하려 들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효력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위 의무는 양자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므로 대법원 판결과는 무관하게 효력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며, 강행법규를 위반한 합의는 무효가 되지만(2023. 2. 2. 선고 2018다26173 판결 등) 품질관리 의무에 관해서는 강행규정이라고 할 것도 없기 때문에 유사사안(발사르탄)에 관한 판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적자치의 원칙상 당사자의 합의가 존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 감경에 관하여는 합의의 구체적 내용과 상황 등에 따라 인정 여부가 달라질 것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특정 의무를 위반할 경우 부담하는 페널티는 민법상 '손해배상액의 예정' 또는 '위약벌'로 보는데,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해석된다면 관련 판결을 근거로 손해액의 감경을 주장할 수 있지만, 위약벌로 해석된다면 감경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위 발사르탄 소송은 벌써 햇수로 5년째를 맞아 여전히 2심이 진행되고 있다. 사안이 복잡하고, 이후 발생되었던(또는 발생할 수 있는) 유사한 이슈에 대해 선례가 될 수 있는 리딩케이스이므로 귀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에 따른 결론이 제약업계와 보험 당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고민해 볼 여지가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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