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걱정말아요, K제약바이오

한해를 제대로 정리하고, 근사한 새해를 설계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되레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른하게 한해의 끝자락을 흘려 보내다, 1초의 흐름이 열어 젖힌 새해를 맞을 때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가슴은 웅장해 진다. 그러므로, 새해는 누구나 팔 벌려 품에 안을 수 있는 시간이자 기회며, 희망의 순간이다.

'신약개발 산업 생태계'도 새해, 새 아침이라는 '값 없는 선물'을 받았다. 몇년 새 급속도로 풍요로워진 신약개발 산업 생태계는 봄과 초여름의 경계에서 크기와 형태와 색채가 제 각각인 꽃들이 피어나 화사한 꽃동산을 이뤘다. 먼저 핀 꽃은 먼저 지며 열매의 모양을 갖춰 가을을 기약하고, 어떤 꽃은 열매의 흔적조차 만들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꽃동산은 무심한 듯 어린 꽃봉오리 행렬은 계속된다.

여기까지 만도 기적이지만, 튼실한 열매를 수확해 글로벌 시장에 내다 비싼 가격으로 팔기까지 '신약개발 산업 생태계'는 온전하지 못하다. 미충족 의료수요를 타깃하는 신약개발 기술들이 돈을 가진 VC를 세르파(Sherpa) 삼아 바이오벤처로 태어나, 내친 김에 자본시장 상장 문턱에까지 이르지만, 기껏해야 한해 20곳 남짓만 상장(IPO)에 성공하는 현실 앞에서 갑갑해 한다.

상장에 성공하면 지금까지 이끌어 준 세르파(VC)는 돈을 챙겨 떠나고, 대신 변덕심한 일반 투자자들을 세르파 삼아 산소가 희박한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등반해야 한다. 험난한 도전이지만, IPO 관문을 뚫지 못한 벤처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M&A 문화가 빈약한 생태계에서 '좀비화를 걱정하는 벤처들'이 적지 않다.  벤처기업이 '도 아니면 모'라는 모험을 전제로 한다해서 '꽃들의 근심'이 없을 수 없다.   

연말 어떤 이에게서 소중한 책 한권을 받았다. "비행기에는 백미러가 없다(2018년 호미 刊)'는 제목의 최남석 회고록이었다. ▷"저를 키워주시고, 지도자의 기본을 제게 보여주신 분. 신약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실행으로 옮긴 분(김용주 레코켐바이오 대표)" ▷"신약개발의 본질인 혁신적 생각, 열정, 격의 없는 토론문화, Data driven decision 프로세스, 상업화를 배웠습니다.(고종성 제노스코 대표)"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최남석 박사를 인터뷰이로 떠올리고는 했었다.

'LG화학 신약 연구부문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오늘 날 배터리를 포함한 전자재료 분야를 일군주역'으로 평가를 받는 최 박사는 큰 기쁨을 체험한 성공한 연구자였다. 연구자로서 자신의 생을 세가지 이벤트와 세가지 희열로 설명하는 그는 "미국 벤처기업 ALZA 책임연구원으로 그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합성 고분자 물질인 크로노머(CHRONOMER)를 발견해 일생 일대의 희열과 함께 정원이 있는 저택에서 백만장자 부럽지 않은 전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첫번째 이벤트이자 희열의 장면이다. 

모국에 돌아온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화공연구부장으로 오디오 비디오 테이프 기초 소재인 폴리에스터 필름을 개발한 뒤 선경화학(현 SK케미칼)에게 기술 이전해 매년 수천억원의 수입 대체효과와 수출 실적을 거두도록 했다. 고 최종현 당시 선경그룹 회장은 최남석 박사와 그의 연구팀에 대한 고마움을 KIST에 10억원의 거액을 출연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 공로로 1979년 과학을 날,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다. "나는 경제적 이득을 한푼도 얻은 것이 없지만 명예를 얻는 희열을 만끽했다."

최 박사 인생의 마지막 이벤트는 1980년, 국책 연구소에서 민간연구소로 옮겨가며 마련됐다.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 기술연구원) 소장을 맡아 이 연구소가 세계 굴지의 연구소로 도약하는데 단단히 기여했다. 국내 최초 FDA 신약 팩티브 개발의 터전을 마련했고, 오늘 날 국내 바이오벤처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 "숱한 고민과 좌절 속에서도 내 인생의 빅 이벤트 세가지를 통해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활철학인 '하면된다, 할 수 있다'였다." Mr. Can Do Spirit이라 할만한다.  
      
박세진 레고켐바이오 부사장(CFO)은 2016년 10월 혁신신약살롱 모임에서 최남석 박사(LG화학 기술연구원 부사장으로 퇴임)를 중심으로 '신약 리더십 사례 연구'를 발표했었다. 박 부사장이 꼽는 최 박사의 핵심 리더십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최 박사는 10년 후를 통찰하고 난 뒤 깃발을 꽂는 리더였다. 대개 제약회사들이 제네릭 비즈니스에 천착할 때 최 박사는 글로벌 신약의 기치를 내걸고, 전자재료를 하겠다는 크고 분명한 깃발을 꽂았다. 오늘의 LG화학 주력 사업이 된 배터리, 편광판, OLED는 그 깃발로부터 비롯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둘째, 꽂아 놓은 깃발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돌진하는, 강한 실행력을 갖춘 리더였다. 최 박사는 미래가치를 품은 연구소를 향해 이곳 저곳에서 들어오는 'R&D는 돈만 든다'와 같은 태클로부터 쓰러지지 않기 위해 대주주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으려 무척 노력했다. 셋째, 최 박사는 일관성 있는 조직, 인사관리 능력을 지닌 리더였다. 최 박사는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어떤 일을 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는 이 사람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조직개편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 부사장은 이를 위인설관(爲人設官)으로 이해했다.

자, 그러면 다시 K제약바이오 신약개발 산업 생태계로 돌아와 보자. 최남석 박사의 리더십에 비춰보면 깃발을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혁신신약(First in Class)이 자라날 토양에 깃발을 꽂고, 흔들림없이, 두려움없이 깃발을 향해 진군하면 된다. 지난한 시간과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제대로 관심받지 못하다 지구를 구한 mRNA 기술도 그렇게 인큐베이팅 됐다. '성공'과 '성실한 실패'를 하다보면 낙엽들을 들추고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는 산삼처럼 K혁신신약도 탄생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신약개발 산업 생태계의 모든 눈동자들이 깃발을 확실히 꽂고 묵묵히 실행하는 곳에 눈길을 주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응원이다. 대한민국 파이팅! K제약바이오산업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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