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하 편집인의 "제약바이오, 사람이 전부다"
글로벌 무대의 한국인_랜선(LAN線) 인터뷰

 릴레이 기획  글로벌 무대의 한국인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은 ‘K-제약바이오’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까지 왔다. ‘사람’이 제약바이오 발전과 변화의 핵심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가야할 길은 멀고 넘어야 할 벽은 여전히 높다. 사람을 빼면 K-제약바이오의 미래는 없다. 글로벌 무대에 선 한국인들을 주목하는 이유다. 한국 땅을 벗어나 열심히 뛰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은 K-제약바이오의 든든한 자산이다.

 

 <7> 박지훈(Jay Park) 박사 (테라이뮨 COO)

테라이뮨 창업대열에 합류한 박지훈 박사(오른쪽)는 2014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 11년차인 아내(강경하), 7살 딸(박서현)과 함께 살고 있다.
테라이뮨 창업대열에 합류한 박지훈 박사(오른쪽)는 2014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 11년차인 아내(강경하), 7살 딸(박서현)과 함께 살고 있다.

 

글로벌 한국인 기획은 인터뷰이들의 추천으로 이어간다. 테라이뮨을 키워드로 2명이 추천됐다. COO인 박지훈 박사와 인터뷰가 한창일 무렵 CEO인 김용찬 박사가 추천됐다. '사람'이 기획 인터뷰의 본질이므로, 박지훈 박사도 김용찬 박사도 히트뉴스의 반가운 인터뷰이로 훌륭하다. 선입선출을 원칙으로 박지훈 박사를 먼저 만난다. 그를 테라이뮨 창업의 길로 이끈 김용찬 박사의 이야기도 조금씩 스포일러 했다.

 

안녕하세요? 박지훈 박사님! 글로벌 한국인 2번째 인터뷰이였던 슈그루 마이온(Sughrue Mion, PLLC) 박현석 변호사께서 글로벌 한국인 다음 주자로 박사님을 추천하셨어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하네요.

"반가워요. 저는 미국 메릴랜드주 게이더스버그시(Gaithersburg, MD)에 위치한 테라이뮨 공동창업자이면서 COO(Chief Operating Officer, 최고운영책임)로 근무하고 있어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도와 회사 운영을 총괄하며 각종 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박현석 변호사님과는 실제로 만나 뵌 일은 없어요. 다만 메릴랜드 지역의 한인제약인협회를 통해 서로 알고 있었고 이번 인터뷰를 위해 통화하면서 서로의 업무와 배경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 지역에 생명과학분야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분들이 많은데, 저를 추천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COO라고 하니 좀 낯선데요 경영관리, 경영기획, 경영전략 이런 용어로 바꿔서 이해하면 되겠지요?

"맞아요. 일반적인 경영문제를 촘촘히 챙기는 사람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바이오 스타트업이다 보니 R&D를 이해하는 저 같은 전공자가 이 분야에서 역할을 맡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거든요."

 

테라이뮨은 어떤 회사죠?

"테라이뮨은 조절 T세포라고 불리는 면역세포를 치료제로 개발하는 바이오벤처에요. 조절 T세포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서 불필요한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기능이 적절히 일어나지 않으면 다발성경화증이나 제1형 당뇨, 아토피성 피부염, 류마티스성 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해요. 우리의 R&D 콘셉트는 환자의 조절 T세포를 이용해서 문제가 되는 면역반응만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테라이뮨 창업 원년 멤버. 왼쪽부터 Nick Hammond 박사, 김용찬 CEO, 박지훈 COO. 창업 초기 27평방미터 임대 실험실에서 촬영했다.
테라이뮨 창업 원년 멤버. 왼쪽부터 Nick Hammond 박사, 김용찬 CEO, 박지훈 COO. 창업 초기 27평방미터 임대 실험실에서 촬영했다.

 

박사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테라이뮨 홈페이지를 봤는데요, 설립자인 김용찬 대표님과 공통 이력이 눈에 띄었어요. 충남대학교나 NIH 같은... 공동창업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밟던 중에 한국에서 상장을 앞둔 기업 인터뷰와 미국에서 바이오벤처를 공동창업하자는 완전히 다른 두 제안을 동시에 받았어요. 고민 끝에 저는 미국에서 바이오벤처를 창업하는데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테라이뮨입니다.

김용찬 대표님과는 대학 동문이에요. 하지만 학번 차이 때문에 대학시절에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어요. 실험실에만 계시는 무서운 선배였다고 할까요. 그러다 2014년 NIH에 박사 후 연수를 나와 동문모임을 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죠. 저는 당시까지 종양대사(Cancer metabolism)를 연구해 왔는데, 면역학과 면역세포치료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었어요. 김 대표님이 워낙 달변가이시거든요. 그렇게 저도 점점 관심을 가져가던 차에 2017년 공동 창업에 대한 제안을 받고 2018년에 미국 영주권을 신청하여, 드디어 2018년 11월에 테라이뮨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2017년 자가면역질환에 도전하는 세포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테라이뮨을 설립한지 만 3년이 지났어요.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일은 없나요?

"후회는 없습니다. 기댈 곳 없는 타향에서 생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으며 자괴감도 많이 들었지만, 결코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남들은 쉽게 겪어보지 못할 기회를 주신 김 대표님께 감사드리고, 제 선택에 만족합니다."

 

테라이뮨 COO로서 박/지/훈이 달성하고 싶은 목표 하나를 꼽는다면요.

"5년 내 상장(IPO) 이지요. 상장 여부는 바이오 스타트업의 온전한 생애주기 같아요. 세포치료제를 이용한 임상시험의 시작과 진행과정, 기술의 라이선스 인과 아웃을 그 사이 경험하겠지요. 이를 기반으로 상장에 성공하고 어엿한 바이오 기업으로 자리잡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올해는 중증 A형 혈우병 환자에게서 발견되는 치료제 내성항체를 제거하기 위한 Treg세포치료제 후보 TI-168이 우리 파이프라인 중 첫 번째로 임상시험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테라이뮨 IPO는 물론 미국에서 하는 것이지요? SCM생명과학, 옵티팜 같은 한국의 바이오기업들과 협업이 특히 눈에 띄는데요,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에 테라이뮨이 무게를 두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직 IPO의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2020년 하반기에 구성된 테라이뮨의 사업개발팀을 통해 한국과 미국에서의 상장 가능성 및 위협 요소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진행하고 있어요. 한국기업과의 협업은 테라이뮨의 첫 투자가 한국에서 유치된 것과 연관이 있어요. 당시 벤처 캐피탈 등 재무적 투자자와 함께 동반성장 가능성이 있는 전략적 투자자도 함께 만났거든요. SCM생명과학은 고순도의 줄기세포배양법을, 옵티팜은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미니돼지 기술을 가지고 있어요. 이 기술들은 테라이뮨의 면역억제력 뛰어난 조절 T세포와 궁합이 굉장히 잘 맞습니다. 저희 기술은 다양한 분야와 접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세계 어느 곳에 있는 기업과도 협업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국 기업이라는 특수성이 고려된 것은 아니에요."

 

한국 생활로 화제를 좀 돌려볼게요. 제약바이오 관련 전공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저는 원래 컴퓨터공학이나 전기전자 쪽을 좋아했는데 대학진학 무렵 이런 학과들의 인기가 떨어지고 생명과학이나 환경 관련 학과 선호도가 올라갔어요. 게다가 IMF 때문에 등록금이 싼 국공립대가 인기였고요. 여기에 제 성적을 대입하다 보니 서울까지는 못 올라가고 충남대학교 기초과학부 부분장학생이 되었고 운 좋게 2학년 때 생화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대학 졸업 무렵에는 항공승무원에 대한 관심이 생겼을 정도로 저는 호기심 많고 장난기 넘치는 성격이었어요. 학업성적은 우수하나 주변이 산만함, 교우관계가 원만하나 때로 장난이 지나침. 국민(초등)학교 생활기록부 평가들이에요."

 

대학원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신 거에요? 실험실에서 차분히 연구만 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으실 것 같은데.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대학교 4학년까지도 딱히 정해 놓은 진로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실험실 생활을 해본 적도 없었구요. 2004년 당시 마침 의과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친구가 찾아와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기초과학에 대해서만 알고 있던 제가 의과대학에서 할 수 있는 중개연구에 대한 눈을 뜬 거죠. 한번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대학동기 4명이 같은 실험실에서 학위과정을 즐겁게 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2008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원.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석사지도 박종일 교수, 두번째가 박사지도 권기량 교수.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지훈 박사.
2008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원.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석사지도 박종일 교수, 두번째가 박사지도 권기량 교수.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지훈 박사.

 

호기심 많은 청년, 박/지/훈의 석박사 시절도 이야기해주세요.

"석박사 모두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에서 했어요. 제가 당시 지도교수님들의 첫 석박사 학생이었지요. 돌아보면 저는 유난히 ‘처음’을 많이 선택한 것 같아요. 제 안에 있는 강력한 호기심 때문이겠지요? 석사 때는 인체 유래 단백질을 분리, 정제하여 종양세포에 대한 독성을 연구했고 박사 때는 한국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미토콘드리아를 공부했어요. 사수도 없이 논문을 찾아가며 실험방법을 셋업했고 한국에 처음 들여온 기계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미국 보스턴까지 날아가기도 했어요. 이때 몇몇 기업과 세포 대사 관련 협업 프로젝트를 운 좋게 진행할 수 있었는데, 제약바이오에 눈뜬 시절이 이때 였던 것 같아요."

 

제약바이오에 눈을 뜨게 됐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에 취업할 생각은 없으셨나요?

"박사과정 동안 3개의 바이오기업들과 공동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약물의 기전을 밝히거나, 후보물질을 도출해내는 연구였죠.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하면서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생겨나기 시작했죠. 이때가 막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에 대한 인식이 점차 퍼져 나가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 아이디어를 학교가 아닌 회사에서 발휘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실 박사과정 중에 몇몇 제약회사에 원서를 넣었지요. 그런데 번번히 탈락했어요."

 

박사님이 탈락한 회사가 어디인지 궁금하네요. (웃음) 어떻게 보면 그때 취업에 실패한 것이 오히려 ‘글로벌 한국인’이 될 기회가 됐다고 볼 수 있겠어요.

"맞아요. 제가 그 때 녹십자나 엘지생명과학에 합격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삶이었겠지요? 회사에 모두 떨어진 이후에 NIH 국립심폐혈연구소(National Heart, Lung and Blood Institute (NHLBI))의 종양대사를 연구하는 실험실[JP1] 에서 박사후 과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거든요. 미국에 오면서 저는 다양성에 눈을 떴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연구와 다양한 접근방법을 배운 것 뿐만 아니라 NIH 한인과학자모임 운영진으로도 활동하면서 새로운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거든요."

 

호기심 많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 NIH 한인과학자모임에서도 통했나 봅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하셨으니까요. 한인과학자모임이 있다니 그 부분도 궁금하네요.

"1964년 임종식 박사님이 한국인 중 처음으로 NIH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요. 현재는 비공식으로 약 500명의 한국인이 PI, 스태프과학자, 박사후 연수생(포닥)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사실 포닥으로 근무하면서 한인 과학자 모임을 이끈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에요. 매년 한국의 과학고등학교, 인재 연구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NIH를 방문하고 그 때마다 안내나 인솔을 담당하거든요. 또 매월 세미나 개최와 연말 학회 개최 등 일들이 다양해요. 번거롭기도 하지만, 저는 그 당시 만났던 동료들에게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험에 대한 도움 뿐만 아니라, 고민 상담이나 수다 친구까지도요. 운영진을 그만둔지 2년여가 지났지만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한인과학자모임 운영진으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있나요?

"가장 뿌듯했던 일은 제가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가족 피크닉을 개최했던 일이에요. 피크닉 날짜를 잡고 준비를 다했는데, 당일 비가 엄청나게 내렸어요. 정말 억수 같았어요. 다행히 행사 며칠 전 비 소식을 접하고 주변 교회에 양해를 구해 장소는 간신히 구할 수 있었어요. 비 때문에 참석자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그 억수 같은 빗속에도 70명 이상의 한인 과학자 분들과 가족 분들이 모여 주셨어요."

2015년 NIHKSA 모임. 맨 앞줄 가운데 주황색 셔츠가 박지훈 박사.
2015년 NIHKSA 모임. 맨 앞줄 가운데 주황색 셔츠가 박지훈 박사.

 

제약바이오 산업 관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궁금해요. 미국은 다 좋다 이런 식 말고 구체적으로 뭐가 좋은지 꼭 찍어주세요.

"연쇄 창업(Serial Entrepreneurship)의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미국 제약바이오 기업, 특히 스타트업들은 성장 단계별로 경영진이 교체되는데, 이는 무능이 아니라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인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는 점이에요. 미국 스타트업 CEO들은 대부분 여러 스타트업을 경험한 이력이 있어요. 이전의 실패에서 쌓은 경험이 다음 기업에서 더 큰 성공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과정에서 기업의 색깔과 기틀을 만든 창업자의 의견은 존중 받아요. 하지만 한국은 창업자가 기업의 존폐와 함께 하는 것이 도의적이라고 믿잖아요? 이런 무한책임의 이면에는 경직성이 있을 수 밖에 없어요.."

 

확장해서 보면 한국식 대주주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기업의 규모가 크던 작던 창업주(혹은 대주주) 리더십은 강력한 추진력이면서 한편으론 성장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한국 제약기업의 역사이니까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한국의 바이오 붐을 일으키고 있는 스타트업들의 문화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바이오 경쟁에 국경이 있을 수 없잖아요. 한국 바이오기업들은 이미 그런 문화와 인식들에 익숙하지 않을까요?"

 

한국기업 이야기를 했으니, 개인적으로 박사님이 기대하고 있는 한국의 바이오기업이 어딘지 궁금하네요.

"큐로셀이요. 저희가 면역세포치료제 개발을 고민하던 2016년 무렵부터 큐로셀 기사를 온라인으로 봤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면역세포치료제에 대한 인식은 솔직히 별로 였잖아요. 김건수 대표님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용감하게 시작하고 임상시험 준비까지 착착 진행하시는 것을 보고 감탄했어요. 저희가 배울 점이 참 많은 기업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은 갖고 있나요?

"미국에 2014년 2월에 왔어요. 결혼 11년차인 아내(강경하), 7살 딸(박서현)과 함께 살고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요. 하지만 15~20년 후 즈음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 사이 한국의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전진기지를 운영하는 것을 꿈꾸고 있어요.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다면 미국에서 성장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새로운 도전이에요. 한국으로 돌아갈 20년 후에는 한국의 제약바이오 산업도 엄청나게 발전했을 텐데, 그때에도 제가 나눌 가치 있는 재능이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제 능력이 쓸모 있다면 당연히 한국에서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도 있습니다."

 

처음을 많이 경험하셨지만, 랜선 인터뷰도 처음이시죠? 어떠셨나요? 히트뉴스 독자들에게도 마지막 인사 부탁드릴게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요. 처음을 피하려는 사람과 극복하려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처음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은 아니에요. 저는 이렇게 감히 추천하고 싶어요.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낯섦이 주는 두근거림을 골고루 즐겨보시라고. 단조롭지 않을 삶을 살아보시라고 히트뉴스 독자분들께 권하고 싶어요."

 

 

박지훈 박사가 추천하는 Next Interviewee?

블루스피어 바이오(BlueSphere Bio)에서 Director of Bioinformatics로 근무하고 계신 김봉현 박사님을 히트뉴스에서 뵙고 싶어요. 김 박사님은 2009년 미국에서 박사 후 연수를 시작하고, NIH와 카이트파마(Kite Pharma, 현재 Gilead)를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에 위치한 TCR분석 기법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의 디렉터로 근무하고 계십니다.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인 면역세포치료제와 빅데이터를 이용한 표적수용체를 발굴하는 일을 하고 계세요. 생명과학과 빅데이터의 만남, 기대되지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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