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지각 변동 본격화…화이자·릴리 등 전략 재편

트럼프 약가 압박 속 DTC 직접판매 확대 유럽 떠나 미국에 쏠리는 자금....'리쇼어링' 통했다

2025-10-02     김선경 기자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약가 인하와 관세 부과 카드를 동시에 꺼내들면서 글로벌 제약산업의 흐름이 재편되고 있다. '최혜국 약가(MFN, Most Favored Nation)' 정책을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제약사들을 직접 압박했고, 화이자의 합의안을 시작으로 글로벌 빅파마들이 본격적인 전략 수정에 나설 전망이다.

 

MFN 합의, 화이자 첫 사례…릴리 등 후속 합류 전망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내 의약품 가격을 해외와 동일 수준으로 낮추는 MFN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7월에는 주요 제약사 17곳에 직접 서한을 보내 "유럽과 미국 간의 약가 격차를 줄이라"며 9월 29일까지 구속력 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이 시한의 만료일에 맞춰 화이자가 첫 번째 합의안을 내놓았다.

화이자는 메디케이드(저소득층 공공의료보험) 처방약을 MFN 기준 가격으로 제공해 미국 환자들이 다른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의 가격으로 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새로 출시되는 신약도 주요 선진국과 동일한 가격으로 책정한다. 또한 환자가 직접 의약품을 할인 구매할 수 있는 연방정부의 DTC(직접판매) 플랫폼 'TrumpRx.gov'에 참여해 주요 1차 진료제와 일부 전문의약품을 평균 50%, 최대 85%까지 할인 판매하기로 했다. 나아가 미국 내 생산 및 연구개발(R&D)에 약 700억 달러(약 98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화이자는 3년간 의약품 수입 관세 면제 혜택을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이자의 결정을 '성공적인 사례'로 홍보하면서 다른 제약사들의 후속 발표도 예고했다. 실제로 협상 과정에서 일라이 릴리가 '환상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언급했으며, 다른 글로벌 제약사도 다음 주 발표를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유럽 약가는 올리고, 미국 약가는 내리고

다른 글로벌 제약사들도 트럼프발 압박에 발빠르게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들은 유럽 내 약가는 인상하고  미국 내 약가를 인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릴리는 비만 치료제 '마운자로'의 가격을 영국에서 최대 170% 인상했다. 최고용량 한 달분 가격은 122파운드(약 23만원)에서 330파운드(약 62만원)로 대폭 올랐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한 환자 부담액은 유지되지만, 민간 체중감량 클리닉을 이용하는 환자들은 인상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당뇨병 치료제 '파르시가', 천식 치료제 '에어수프라', 독감 백신 '플루미스트' 등을 미국에서 DTC 방식으로 판매하며 최대 70% 할인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BMS와 화이자는 경구용 항응고제 '엘리퀴스'를 미국 환자들에게 40% 할인된 가격으로 직접 판매하기로 했다. 또한 내년 영국에 출시할 조현병 치료제 '코벤피'의 약가를 미국과 동일하게 책정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미국 내 월 1850달러(약 258만원) 수준으로, 유럽 시장에도 동일 가격을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리쇼어링' 통했다...美 의약품 제조시설에 수백억 달러 투자

트럼프 대통령은 MFN 외에도 '의약품의 미국 내 제조 및 생산 확대'를 추진해왔다. 10월 1일부터 브랜드 의약품 및 특허 의약품 완제품에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했으며, 미국 내 공장을 착공했거나 건설 중인 회사는 관세에서 제외된다고 못박았다. 백악관은 일본과 유럽 등 협상 타결국에는 15%만 부과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은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영국 케임브리지 본사 인근에 2억파운드 규모의 신축 R&D 시설과 리버풀 백신 연구·제조시설(약 6억1000만 달러) 투자를 취소했다. 일라이 릴리도 영국 정부와의 투자 협약 일환으로 준비하던 '게이트웨이 랩스' 설립을 연기했다. 머크는 런던 킹스크로스에 10억 파운드(약 13억달러)를 들여 건설하려던 대형 R&D 센터와 영국 본사 계획을 전면 철회하고, 연구개발 조직 철수를 결정했다.

이와 반대로 미국 내 투자 확대는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릴리는 향후 5년간 총 270억달러를 들여 4개의 신규 생산 시설을 짓겠다고 밝혔다.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ADC 및 단클론항체 생산 공장을, 텍사스주 휴스턴에는 합성의약품 API 제조시설을 건설한다. MSD는 항암제 '키트루다' 생산을 위한 10억달러 규모의 델라웨어 공장을 착공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HPV 백신 공장 투자도 확대한다. 존슨앤드존슨도  미국 내 제조 확대를 위한 투자의 일환으로 CDMO 업체 후지필름 바이오테크놀로지스와 향후 10년간 20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GSK는 5년간 30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전역에서 연구개발 및 공급망 인프라를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글로벌 제약사들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약가가 미국 기준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집중되는 대규모 자금 흐름도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약산업의 중심축이 미국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변화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