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 포커스] 국산 원료의약품 자립, 아직도 선언 수준… '필요한 건 정책실행'
생산 수요 국가 책임제·세재 감면·금융지원 확대 등 대안은 나와있어 원료약 기초 산업 무너지면 신약개발 국내 생산은 요원
<Scene> 2023년 5월, 샌디에이고에서 개최된 바이오USA 내 한 회의 장소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주최는 미국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 그리고 참석자는 한국의 국가안보실 3차장을 비롯한 일본, 인도, 유럽 등 5개국의 안보 관계자들, 각국에서 선정된 기업 대표들이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에 따르면 '단순한 공급망 문제가 아닌 안보 전략회의'였다. 즉, 글로벌 바이오 공급망을 어떻게 '안보적 관점'에서 재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자리였다.
"원료의약품 30~40%가 중국산이고, 인도에서 생산되는 약도 출발물질은 대부분 중국에서 옵니다. 팬데믹 등의 사태가 발생하면 세계 공급망은 바로 무너질 수 있어요."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 원료의약품의 중국 의존도는 40%를 넘었고,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위기 대응 전략은 미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파계·페니실린 모두 무너져… 생산기반 복원 시급
국산 원료의약품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아세트아미노펜 품귀 사태와 타미플루 수급 문제 등은 원료 확보 실패가 얼마나 직접적으로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현장의 전문가들은 '그때 뿐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반복되지만, 해법은 구호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에 또 한번 기대를 걸고 있다.
최근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개최한 '국민건강 안전망 구축을 위한 의약품 제조역량 강화방안 토론회'에서 종근당바이오 박완갑 대표는 국가필수의약품이 낮은 생산성과 비용 부담 문제로 공급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들어 원료의약품에 대한 정부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표에 따르면 2025년 기준으로 473개 품목이 국가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됐으나 이 중 상당수는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전체의 15%, 필수의약품에 한정하면 13%에 불과해, 대부분을 중국과 인도 등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도 국내 항생제 시장은 연평균 7% 성장했지만, 원료의 75%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세파계 항생제의 국내 생산 비중은 2019년 51%에서 2023년 30%로 급감했으며, 이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 시 국내 환자 치료가 지연되는 등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다. 페니실린계의 원료 자급률은 최근 5년간 0%로, 더욱 심각하다. 가격 경쟁력 저하와 정부의 실질적 지원 부족 등이 국내 생산 기반의 약화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엄승인 전무는 지난 3월 협회 전문기자단과 가진 간담자리에서 국내 원료의약품 산업 문제점을 진단하고 활성화를 위한 해결방안을 언급했다. 국내에서는 약가인하 정책으로 의약품 수익성(채산성)이 악화되면서 제약사가 국산 대신 저렴한 해외 원료의약품을 쓰고 있는 실정이며 이로 인해 원료의약품 산업 축소와 자급력 저하가 발생했고, 이는 필수의약품 공급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필수의약품과 퇴장방지의약품 실태조사 결과 최근 3년간 생산·수입이 중단된 의약품은 46개 품목으로 집계됐으며 원료의약품 산업을 둘러싼 여건과 환경부터 개선되지 않으면 원천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사실 이 같은 문제는 하루아침에 부각된 것이 아니다. 지난 2022년 7월 열린 '위기의 한국 원료의약품산업, 활성화 방안은?' 정책 토론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논의됐다. 당시 토론회에서는 원료의약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이유로 국산 원료의약품이 수입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낮고, 종류도 제한적이며, 수익성이 낮아 개발에 뛰어드는 업체도 적다는 점이 지적됐다.
정책 고민은 충분, 실행은 부족
국산 원료의약품 살리는 실효 대책은
전문가들은 국산 원료의약품을 단순한 산업재가 아니라, 공공재이자 전략물자로 규정하고 이에 걸맞은 제도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순한 인센티브 제공을 넘어서, 공공 조달과 수요 창출, 판로 지원까지 연계된 종합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완갑 대표는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실질적 대책으로 △전략 원료의약품 지정 제도 △국산 원료 사용 시 약가 우대 △원산지 표시제 △공공조달 확대 등을 제안했다. 그는 "국가가 일부 수요를 보장해주고, 생산에 대한 명확한 인센티브가 있으면 민간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필수의약품의 안정적 공급과 국민 건강 안전망 강화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국내 원료의약품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고 국민 건강을 지키는 국가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전했다.
원료의약품 기업인 YS생명과학의 오창영 대표는 "국산 원료의약품 사용 확대를 위한 정책적 논의는 충분하다. 이미 수많은 업계 전문가들이 문제와 대안을 짚었다"며 "지금 필요한 건 실행력"이라고 강조했다.
작년 정부는 '국가 필수의약품' 제도를 통해 원료 국산화 품목에 대해 약가를 최대 68%까지 우대한다고 밝혔지만 업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 대표는 "이익이 되지 않는 품목에 15%를 더 얹어준다고 누가 뛰어들겠나.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약가우대만으로는 생산 기반을 복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오 대표는 생산 수요를 국가가 일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 보건소, 국공립병원 등 공공영역 조달에 ‘국산 원료 사용’을 조건화하거나, 일정 비율 이상 국산 원료 사용 품목에 입찰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이다. 장기적인 수요 개런티가 없으면 기업은 설비를 놀릴 수 없고, 결국 투자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두번째는 세제 감면과 금융 지원 확대다. 현재 원료의약품 공장 신·증설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지원은 없는 상태다. GMP 기준을 충족하는 시설을 짓기 위해 수백억 원이 소요되지만 정책자금도 조세 인센티브도 미비한 상황이다. 오 대표는 "인도는 일정 품목에 대해 생산량 기준으로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설비투자에 대해 대규모 지원을 한다"며 "우리는 GMP 허가를 받기 위해 2~3년을 대기하고 그동안 매출 없이 버텨야 한다"고 언급했다.
오 대표는 국산 원료 사용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정보 제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원료의 원산지를 의약품 라벨에 명시하거나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병·의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환자나 의료진이 원산지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대표는 "유기합성 기반의 전통적 원료 개발은 사실상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으며 관련 인력 수급조차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이 같은 기초 산업 기반이 무너지면, 아무리 고부가가치 신약을 개발해도 국내 생산은 요원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R&D 지원의 균형성 회복도 과제라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