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환자들의 고통에 대답할 수 있나
데스크칼럼 | 2020~2024 국회 국민동의청원 중 환자 문제 채택 사례 1건도 없어 중증·희귀질환 치료 접근성 확대 요청, 고질적 무관심 속 '폐기' 되풀이 소아희귀안질환 등 청원 진행 중...국민 5만명 동의 얻어야 국회 제출
45년 만의 계엄 사태로 예산 정국이 얼어붙었다. 국회 사무와 의정활동이 사태 수습에 매몰되고 예산 확보에 나서야 할 공직사회도 일제히 몸을 낮췄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정부 예산안 677조4000억원 대비 4조1000억원 감액한 내년 예산안을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원칙적으로 지난 2일 예산안을 상정해야 하지만 여야 합의 없는 예산안 처리에 부담을 느낀 국회는 최종 처리 시한을 미룬 상태다.
매년 12월 초순은 예산 심사의 마지막 보루다.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 10일을 앞두고 필수예산 막후 협상을 위한 국회 방문이 도처에서 몰리는 시기다. 그러나 국회가 계엄 후폭풍을 정면으로 맞은 올해 상황은 180도 다르다. 계엄 사태 후 출입 제한이 일부 해제되며 비교적 빠른 회복력을 보이고 있지만,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의원실 방문이 사실상 차단됐다. 비상대기 중인 의원실 관계자는 "계엄 사태 이후 다른 사안은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도 "올해 국회 상황이 엄중해 예산 의제를 살리기 어려워졌다"며 "민생 예산 등에 대한 추가 검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감액 상태로 확정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우려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치료 접근성 확대를 기대해 온 환자와 가족들은 올해도 끝 모르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생명과 안전을 양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현황에 따르면 21대부터 22대(2020.5.30~2024.12.8)까지 약 4년 6개월 동안 국회에 접수된 국민동의청원 256건 중 국민 의견이 채택된 실적은 단 한 건도 없다. 보건복지위원회 소관 청원 33건도 모두 임기만료료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매년 수많은 국민청원이 국회에 제기되지만, 30일 동안 국민 5만 명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국회 또는 처리 담당부처에 제출될 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중증·희귀·난치질환 치료 접근성과 관련한 환자와 가족들의 청원은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된 대표적 사례들이다. 유방암치료제 '엔허투' 허가 밎 급여 관련 청원은 2022년 8월과 2023년 2월 각각 접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으며, 이후 논의가 진전돼 2024년 3월 급여 적용을 받았다. 삼중음성유방암 4기 환자를 위한 '트로델비' 건강보험 등재 청원은 올해 1월과 5월 연달아 접수됐으나, '임기만료 폐기'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유전성 희귀질환 XLH저인산혈증구루병 치료제 '크리스비타' 보험 적용(2022년 11월) △뇌척수전이 유방암치료제 '투카티닙' 국내 승인(2023년 11월)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약인 루타테라 치료횟수 제한 폐지(2024년 2월) △만성골수증식성 질환 치료제 ‘베스레미’ 보험 적용(2024년 2월) △폰히펠린다우증후군 치료제 '웰리렉' 보험 적용(2024년 6월) 등 중증·희귀질환 관련 청원들이 5만명 이상 동의를 받고도 검토 대상에 오르지 못했다.
올해도 중증·희귀·난치질환 치료 접근성과 정부 지원 확대를 위한 환자와 가족들의 청원은 계속되고 있다. 오는 12월 19일까지 소아희귀안질환 유전자·세포치료를 위한 청원이 진행 중이나, 8일 기준 2만1505명이 동의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실정이다.
청원을 올린 희귀안질환 어린이 가족은 "희귀안질환 환아들을 위한 유전자·세포치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유전자세포치료센터 설립을 위한 예산 확보와 임상 연구비 지원 등에 관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이를 통해 수억원대 고가 치료비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환아들에게 임상 치료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소아희귀난치안과질환협회 이주혁 대표는 "최근 일련의 정치 상황으로 올해도 아이들의 치료와 생명 연장에 꼭 필요한 예산이 반영되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라며 "세포유전자치료 발전을 위한 국가세포유전자치료센터 건립 예산이 내년 예산안에 조속히 반영되고 첨단재생의료법 개정도 적시에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더 많은 국민이 환자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길 희망한다"며 지속적인 관심과 동의를 촉구했다.
지난 주말 대통령 탄액안 투표 불성립에 이어 탄핵 정국이 장기화할 것이란 전망 속에서 예산·입법 처리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오늘의 국회는 난세를 뚫고 환자들의 고통에 대답할 수 있을까. 국가 안위와 국민 생명이 경각에 달린 안타까운 현실에서도 '기적의 회복'을 끌어내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