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니까요. 두 눈으로 봤어요"

생각을 HIT | 낙태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우리가 모른척 해왔던 '그' 문제

2024-08-26     이종태 기자
사진출처: AI생성 이미지

영어 표현중에 방 안의 코끼리(the elephant in the room)라는 말이 있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이 모두가 문제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현상을 비유할 때 쓴다. 어쩌면 방 안의 코끼리 문제를 적어도 내가 앞장서서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 일 수도 있다.

최근 거대한 코끼리를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다가 결국 큰 문제가 터졌다. 얼마전 유튜브에는 36주에 낙태시술을 받은 영상이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36주(9개월) 태아를 낙태했다는 영상에 대중들은 가짜영상이라고 치부했지만, 경찰 조사결과 사실로 드러나면서 충격이 확산중이다. 어쩌면 영상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어딘가에서 36주차 낙태시술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충격일지도 모르겠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사회에서 낙태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낙태를 결행한 본인은 물론 낙태시술을 한 의사까지도 모두 사법 처리 대상이 아니다. 재판부에서는 형법상 낙태죄가 임신부의 자기결정권 및 건강권을 제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36주 영상 사건에서 눈여겨봐야할 점도 이 대목이다. 9개월 태아는 그 즉시 출생이 이뤄져도 특별한 생명유지장치가 없어도 생존이 가능하다. 골격도 이미 발달했기 때문에 흔히 알려진 임신초기의 낙태방법을 사용하기는 어렵다. 낙태시술에도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쟁점은 하나다. 조산을 유도한 이후 태아를 사망케 했는지, 태내에서 사망시킨 이후 제왕절개 방식으로 꺼냈는지 여부다. 

만약 조산을 유도한 이후 태아를 사망시켰다면 명백한 살인이지만 태내에서 사망시킨 이후 꺼냈다면 무죄다. 임신부의 배 속의 태아는 법적으로 모체 밖으로 나와야 생명으로 인정된다. 조산을 통해 태아가 밖으로 나왔다면 생명으로 인정, 살인죄가 불가피하지만 출산 이전에 사망케했다면 낙태로 인정, 죄가 아니다. 현대 의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 임신 20주(5개월) 이후부터 조산이 가능하다. 법적으로 본다면 5개월의 조산아는 생명이지만 9개월의 태아는 생명이 아닌 셈이다.

36주 영상이 매스컴을 타던 시기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기자에게 "저런건 불가능하다. 낙태가 가능하지도 않고, 해주려는 병원도 찾기 힘들다. 사실상 살인이라는 걸 모르는 의사가 없을 것. 누가 해주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다. 출산예정일 전 날에 산모가 마음을 바꿔 낙태를 해도 돈만 충분하다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법률과 의학의 정의 사이에 괴리가 있다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사회가 그동안 방 안의 코끼리를 얼마나 모른척하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리면서 정부와 국회측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개선입법을 요구했지만 5년넘게 방치해왔다. 사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삭제한 것이 아니라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2020년까지 개선하는 입법을 하라고 했지만 그 기한을 넘겨 낙태죄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 사회는 2021년 현대약품이 국내 최초로 허가신청한 낙태약 미프지미소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았을 때 다시 한번 이슈화되면서 후속입법 기회가 있었지만 놓쳤다. 당시 낙태약은 전문/일반의 처방 및 원내/외 처방, 건보급여 여부 등이 이슈로 올랐다. 이를 위해 국회에서도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의 국정감사에서 이슈로 올렸지만 당시에만 반짝였을 뿐, 정치적 부담, 종교적인 이유 등을 이유로 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사회가 태아의 개월 수, 임신중절의 방법과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낙태를 허용할 것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후속입법을 완수해야한다. 임신부와 태아, 의료진들을 보호할 수 있는 규정과 시스템을 마련하고 낙태가 제도권안에서 행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법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줄어드는 출산율을 올리거나, 여성의 자기결정권, 종교적인 관점 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사회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낙태를 인정하고, 안전한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자는 취지다. 낙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5년전부터 우리 방에 코끼리가 들어온 것을 우리는 모두 지켜 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못본체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