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동등하게 선택 가능한 의약품을 위하여

생각을 HIT | 금액 부담 커…정부 지원 병행 필요

2024-07-25     현정인 기자

학창시절 쉬는 시간만 되면 뒷자리에서 카드 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다. 조커가 나오면 유리하기 때문에 가끔은 카드를 나눠주며 이 카드가 조커일까 혼자 기대도 했다. 하지만 눈 앞에 수많은 카드가 놓여있다면, 뒷모습만 보고 조커 카드를 한 번에 찾을 수 있을까. 확률상 쉽지 않을 것이며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다른 가정을 한 번 해본다. 이게 카드가 아니라 건강에 직결되는 약이라면 어떨까. 두통약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어 약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카드는 또 뽑고 또 섞어서 없는 일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약은 먹기 전까지 스스로 알 수 없다. 어쩌면 먹고 나서도 모를 수도 있다. 결국 의약품을 오용할 가능성이 커진다.

아파서 약을 먹었는데 잘못 먹었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상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현실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따르면 의약품 점자 표기가 미흡해 약물을 잘못 복용하는 사례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관계자는 "의약품에 점자가 없는 경우가 많아 어떤 약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심지어 점자가 있는 경우에도 약마다 점자 위치와 크기가 달라 한 번에 찾기 힘든 경우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시각장애인은 의약품을 안전하게 복용하고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왜, 그들은 의약품을 구별할 수 없었을까. 지난 21일로 안전상비의약품을 비롯한 일부 약에 대한 점자 표기가 의무화됐지만, 취재 결과 의무화 품목 외 다른 의약품에 대해서는 점자 표기가 미흡했다. 평소 취약 계층과 동행을 내세우며 사회공헌 활동을 꾸준히 해왔던 제약사지만, 아직 더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현재 다양한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한 기업 측이 "금액 부담이 있어 많은 품목에 확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답한만큼 정부의 지원도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 장애인 실태 조사 결과 2020년 기준 시각장애인 중 점자 사용이 가능한 비율은 9.6%다. 물론 이 비율은 점자가 필요 없는 등급의 시각장애인까지 조사군에 포함됐기에 실제 점자 사용율은 더 높을 수 있지만, 일각에서는 전체 시각장애인 25만명 중 9.6%면 약 2만명 남짓이기에 신경 쓰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제약사들은 너도 나도 ESG 경영을 내세우며 보고서 발간에 나서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건데, 모든 사람이 제품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동등하게 접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면 그것 또한 중요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게 아닐까. 모두가 평범한 소비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