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수색과 사직… 의료대란 속 까맣게 잊혀진 필수의료
필수의료 패키지 '의료대란' 타임라인
[끝까지 HIT 9호] 우리는 회사에서 회의를 합니다. 안건을 내고 의견을 제시해 다음 행동을 결정하죠. 이렇게 보면 회의란 게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회사원들은 그토록 회의를 두려워하며 진저리를 칠까요?
그건 많은 경우 회의에서 안건ㆍ의견ㆍ행동 중 하나 이상의 요소가 과하게 축소되거나 확대되기 때문일 겁니다. 본래 의논돼야 했던 안건이 잊혀진 회의, 누군가가 너무나 많은 의견을 내는 회의, 아무런 행동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회의는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 회의는 회의가 되지 못하고 잡담시간이나 성토대회에 준하는 무언가가 되고 맙니다.
이번 '의료대란'은 그런 회의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건이 잊혀진 회의입니다. 우리 찬찬히 되짚어봅시다. 정부와 의사들은 무엇을 얘기하려다 '요지경'이 된 것인지 말입니다. 돌아보니 발 밑에 채이는 건 정부의 압수수색과 의사들의 사직이고, 눈 앞에 보이는 키워드는 '의대 정원 증원(의대 증원)'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필수ㆍ지방의료 확충'이었다는 사실을요. 여기 써둔 의료대란 타임라인의 시작과 끝을 보면, 필수ㆍ지방의료 이야기가 사건의 시발점이었으나 그 끝은 돈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부도, 의료계도 안건을 단단히 잊어버리고 전혀 다른 주제를 가져다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필수의료 패키지 안에 생뚱맞게 끼어있었던 의대 증원입니다. 오직 필수ㆍ지방의료를 강화시키는 방법만이 있어야 하는 패키지에 너무나 다른 성격을 띤 주제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정부는 '의사가 부족하니 의사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우리나라는 의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필수과ㆍ지방에 근무하는 의사가 부족합니다. 의사가 갑자기 많아진다 해서 이들이 저절로 필수과ㆍ지방에 가길 선택할 거라는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이토록 얕은 논리로 의대 증원을 내세웠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즉 의대증원이란 주제에 한해 정부의 본심은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분으로는 필수ㆍ지방의료 확충을 내세웠지만, 진짜 목표는 '의료비 절감'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의사들이 버는 돈을 줄이겠다'는 것이 베일 뒤에 가려진, 그러나 너무나 잘 보여서 의사들을 분노하게 만든 정부의 진의입니다.
의사들의 소득을 깎는 것이 어떻게 좋고 나쁜지는 사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말이죠.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한도 내에서 의사들을 옥죄는 정부의 폭거, 그리고 정부가 의사의 소득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 양 환자를 볼모로 잡은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는 지금 논할 주제가 아닙니다. 여기 눈길을 주면 줄수록 이 거대한 회의장의 원래 안건이었던 필수ㆍ지방의료 확충은 해묵은 염원인 채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니 모두 자세를 고쳐잡고, 의자를 끌어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옵시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손에서 놓고 필수ㆍ지방의료 확충이란 본래 안건만을 꺼내 이야기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지금 발휘 중인 집단지성의 반만이라도 이 안건을 고민하는 데에 써 주었으면 합니다. 안건이 잊혀진 회의에 모두가 지쳐 회의실을 떠나 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2024년 2월 1일
정부는 민생토론회에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패키지의 목표는 크게 2가지다.
①소아과ㆍ흉부외과ㆍ산부인과 등 필수과(기피과)로 유입되는 의사의 수를 늘리는 것
②수도권 외 지역으로 유입되는 의사의 수를 늘리는 것
이에 패키지에선 4개의 정책이 추진될 것임이 명시됐다.
①의과대학(의대) 정원 확대
②지역의료 강화
③의료인 형사소속 부담 완화
④필수과 수가 인상 및 비급여 진료 가격 억제
2024. 2. 6
정부는 브리핑을 통해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의협)의 반발이 시작되자 정부는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를 설치해 대응했다. 보건복지부는 의사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의협은 명령에 반발해 총파업을 예고했으며, 전공의들의 사직서 제출이 시작됐다. 사직은 엄밀히 말해 파업이 아니므로, 정부의 집단행동 금지 명령을 회피하면서도 파업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2024. 2. 7
보건복지부는 수련병원에 '사표 수리를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법조계에서는 의사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과 정부의 사표 수리 금지 명령 중 어느 쪽이 적법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법조계 일각에 따르면 의사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은 의료법 제59조를 위반하는 것이다. 해당 조항은 '보건복지부장관은…국민보건에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면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에게 필요한 지도와 명령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특히 집단 사직서는 단순한 퇴사 의사를 보이는 것이 아닌 명령 불응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반면 일부 법조인들은 정부의 사표 수리 금지 명령이 근로기준법을 위반한다고 해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사표 수리 금지 명령은 '전문의 수련 규정' 제15조에 근거해 내려졌으나, 해당 규정은 수련의에 관한 것일 뿐이다. 수련의들은 수련의이기 이전에 근로자이므로, 상위법인 근로기준법이 강제 노동을 금지하는 만큼 사표 수리 금지는 위법이라는 해석이다.
2024. 2. 14
전공의들은 정부 명령에 의해 사표 수리가 금지되더라도, 민법 제660조 제2항에 의해 사표 제출 1달 후에 사직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2024. 2. 15
보건복지부는 중수본 브리핑을 통해 전공의들의 주장에 반박했다. 전공의들이 사직한 이유가 표면적으론 개인적인 사정일지라도, 그 진의는 집단행동일 경우 민법 제107조 '비진의의사표시'에 의해 사직은 무효가 된다는 논리였다.
같은 날 의협 산하 16개 시도의사회가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원을 2000명이나 늘리면 의대 교육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려 국민의 건강권을 훼손할 것"이라 주장했다.
의대 학생들의 동참도 시작됐다. 한림대학교 의대 본과 4학년 학생들은 집단휴학을 결정했다. 3일 뒤인 18일엔 원광대학교 의대생 160여명이 휴학을 신청했다.
2024. 2. 16
보건복지부는 브리핑에서 "(현)정부는 굉장히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한다"고 경고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업무개시명령을 따르지 않은 의사들을 의료법ㆍ응급의료법ㆍ공정거래법ㆍ형법(업무방해죄)등으로 고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2024. 2. 19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약 600명이 사직했다. 삼성서울병원ㆍ서울성모병원ㆍ서울아산병원에 속한 대부분의 전공의들도 사직 행렬에 동참했다. 전국 수련병원에서 같은 행동이 이어지며 수천 명의 집단 사직이 현실화됐다.
보건복지부는 전국 수련병원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진료유지명령을 내렸다.
2024. 2. 21
의협은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국민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의사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각에선 '의협이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잡았음을 인정한 발언'이란 해석이 나오며 논란이 일었다.
같은 날 보건복지부는 100개 수련병원의 전공의 중 약 71.2%가 사직서를 제출했고, 63.1%는 근무지를 이탈했다고 밝혔다. 해당 인원들에 대해 업무개시명령이 송달됐으나, 전공의들은 우편ㆍ전화를 받지 않는 등 명령을 회피했다.
2024. 2. 22 ~ 29
전공의들의 의료 현장 이탈로 중환자 진료 불가ㆍ이송 지연 소식이 이어졌다. 정부는 전공의들에게 "2월 29일까지 복귀하라"며 "3월부터는 미복귀자의 면허를 정지하겠다"고 통보했다.
2024. 3. 1
'의료대란'의 첫 강제수사가 시작됐다. 서울경찰청은 의협과 서울시의사회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2024. 3. 3
의협은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진행했다. 대회에 약 2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제약사 영업사원 동원령에 대한 글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긴급으로 회원사들에 메시지를 발송해 "이해관계가 없는 영업사원이 외부 강압으로 참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고 당부했다.
2024. 3. 5
전국 40개 의과대학이 신청한 2025년도 의대 정원 증원분이 3401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정부가 당초 밝힌 2000명에서 1400명가량 증가한 수치였다.
2024. 3. 16
전국 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달 25일부터 대학별로 사직서를 내기로 결의했다.
2024. 3. 17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은 YTN 뉴스와이드에 출연해 "의대 증원 없이 수가 인상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건강보험료가 3~4배 이상 올라갈 것"이라며 "비급여 분야와 미용성형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는 문제가 있어, 이 부분과 균형을 맞추려면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라고 정부 방침을 설명했다.
참고
이 기사는 <끝까지 HIT> 9호 발행 시점인 3월 중순을 기준으로 작성됐다. 18일 기준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배정안에는 아직 변동사항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유예 여부를 두고 곳곳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한편 지난달 26일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해 '강경파'로 분류되는 임현택 당선인이 차기 의협회장으로 당선되며 정부-의협 간 분쟁은 격화 일로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임 당선인은 지난 2월 1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의료개혁 민생토론회에서 행사장 입장을 시도하다 대통령 경호처 직원들에게 가로막혀 제압당해 일명 '입틀막' 논란을 비화시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