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동물로 성장한 천병년의 더 커진 꿈

[칼럼] 새 이정표를 세운 우정바이오 신약개발클러스터

2021-10-06     조광연 기자

씨앗과 열매 사이의 거리는 아련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의 뜨락에 고독하게 떨어진 씨앗이, 고즈넉한 가을의 단단한 열매로 영글기까지 밤과 낮은 수없이 교차한다. 한 인간에게 착상된 꿈이라고 하는 씨앗도 손안의 열매가되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수없이 흘러야 한다. 숱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씨앗에서 멈추는 꿈은 이보다 훨씬 많다.

지난달 30일 준공한 '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지하 5층, 지상 16층 건물)'는 천병년 우정바이오 대표에게 달콤한 열매이자, 신약개발을 위해 파종한 또하나의 씨앗이다. 서울약대 10년 선배인 유한양행 중앙연구소 이종욱 약리안전성 연구실장(현 우정바이오 회장)의 권유를 귀담아 듣고 1989년 시작한 '실험동물 공급사업'은 30년 세월을 겨쳐 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로 우뚝 솟았다.

신나는 일을 앞둔 탓에 볼 빨갛게 된 소년처럼 천 대표는 이날 인상적인 인사말을 남겼다. "창업 10년동안 신약개발에 필요한 실험동물을 공급하고, 사육하며, 실험시설 구축 사업을 했습니다. 2000년 무렵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엄청난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신약개발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될까, 문득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 때 하나의 생각이 떠 올랐는데, 사용자 친화적(user friendly) 민간인프라였습니다." 

보스턴은 천 대표가 행동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었다. "민간인프라를 떠올린 몇 년 뒤 보스턴바이오클러스터의 성공과 켄달 스케어(Kendall Square)의 변신을 목격하며 나도 준비할 때가 되었고, 성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한국형 신약개발 생태계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습니다. 수년간 심사숙고와 준비기간을 거쳐 꿈 꾸던 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라는 실체를 현실로 완성하였고, 오늘 여러분들께 보여드립니다."

천 대표는 동탄역과 경부고속도로 5분 거리의 민간인프라 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가 '신약개발 전문가들의 신나는 놀이터'가 되기를 소망한다. "초기 창업을 생각하는 과학자, 스타트업, 비임상임상 전문가, 특허(IP) 및 계약 전문가, 대형바이오제약사들이 어우러져 재미있게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겠습니다. 상생비지니스모델입니다. 투자 및 M&A전문가들에게 수준 높은 시험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술평가서 제공을 통해 정확한 투자판단을 하게 하고 국내외 기술거래를 활성화시키려 합니다."

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우신클)와 천 대표의 미래를 향한 스토리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1979년 동경대학에 유학갔을 때 연구환경을 지켜보고 질려 대한민국은 신약개발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좌절했다는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학에서 쥐같이 생겼으면 쥐라고 여기고 원시적인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쥐 장수로 변신해 찾아온 천 대표를 보고 놀랐지만, 그의 개척자 정신 덕분에 연구자들이 세계 과학계에서 통하는 연구논문을 많이 낼 수 있었다"고 고마워 했다.

고한승 한국바이오협회장(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도 우신클을 높게 평가했다. "조그만 건물에서 한 성공한 사업가의 꿈을 선언하는 자리인가보다 하고 왔다가 놀랐습니다. 바이오협회 회원사 70%가 스타트업으로, 실험할 수 있는 공유오피스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데 그 해법의 실체가 여기 눈 앞에 있습니다. 특히 30년 (실험동물과 이를 기반으로 한 비임상 시험) 노하우를 이용해 신약개발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하는데 의미가 큽니다."

'신약개발 놀이터' '30년 노하우 같은 추상명사'는 곳곳에 마련된 만남의 장소와 지하 실험동물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층과 층사이 계단에 설치된 자유로운 만남의 장소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발표장소가 여럿 있었고, 실험동물 들의 공간은 호텔처럼 럭셔리했다. 독자적인 연구를 위해 대여가 가능한 실험동물 스위트 룸(Suite Room) 앞에 섰을 때 바이오벤처를 창업한 넥스트젠 이봉용 대표가 "사용료가 얼마냐, 지금 계약할 수 있냐"며 급 관심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웃게 했다.

"가구가 과학이라고요? 아닙니다. 디지털 케이지가 과학입니다." 천 병년 대표는 또다른 실험동물 공간(비바리움)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는 "투약한 실험용 쥐, 특히 야행성인 쥐가 밤에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 디지털 케이지가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데 이는 비임상효력시험에서 효과가, 임상시험에서 재현되지 않는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일지 모른다"고 해 관심을 끌었다. 심창구 교수의 말처럼 '쥐장수 천병년의 또다른 씨앗'은 신약개발이라는 또다른 열매를 소망하며 2021년 9월30일 경기도 동탄에 파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