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처지에 맞춘 일방주장보다 상대 살려야 나도 산다는 고민 필요"

박카스의 올해 매출이 3000억 원을 훨씬 넘길 것 같다. 최근 공개된 '동아쏘시오'와 '동아에스티'의 공시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매출이 작년 동기보다 13.1% 증가된 682억(내수 471억, 수출 211억) 원으로 나타났고, 작년 매출 2963억 원을 근거로 한 예상이다.

이처럼 '박카스'는 지금도 새로운 신화를 계속 써가고 있다. 내년이면 발매 60년. 2005년 광동제약 '비타500'에 밀려 제약 드링크계 왕좌 자리를 잠깐 내 줬지만, 2011년 약국 외 장소에서도 판매가 가능한 '의약외품'으로 전환하며 후발 주자를 멀리 따돌리고 불사조처럼 다시 질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 장수품목으로 박카스를 꼽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2000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분석·발표한 유명 장수 히트상품을 보면, '박카스'는 롯데의 '칠성사이다', '럭키(LG) 하이타이', '농심 새우깡' 그리고 '오리온 초코파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박카스'는 1961년 당시 부채로 위기에 몰렸던 동아제약의 "회사를 살리라"는 소명을 받고 당의정(糖衣錠)으로 태어났다. 영업은 기대 이상 부응했으나 제제기술 미숙으로 당의가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앰플'로 탈바꿈했으나 그것도 개봉상의 불편함과 유리 파편 및 운송 시 높은 파손율 등으로 1963년 '스크류 캡, 병 포장 드링크'로 긴급 변신했다.

그 때 동아제약은 박카스에 사운을 걸었던 것 같다. 자금 유동성 악화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빚을 내 광고·선전에 올인했다.

1960년대 우리의 의약품시장은 비타민 전성시대였다. 일제 수탈과 한국전쟁 등으로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던 국민들은 미국 등의 구호물자 중 비타민을 가장 선호했다. 이와 같은 시장성에 맞춰 동아제약은 '박카스'를 개발해 냈다. 알려진 것처럼 '박카스'라는 이름은 로마신화의 '바쿠스(Bacchus)'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한다. 바쿠스(그리스신화의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며 풍요(추수)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이다.

동아제약의 '승부수'는 적중됐다. 뚝심과 마케팅 과학의 결합이었다. '바쿠스' 신(神)은 당시 동아제약 소원을 지금까지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박카스의 대중광고에 따른 풀링(pulling)력은 대단했다. 광고 효과가 '보일링 포인트(boiling point, 비등점'를 넘어 부글부글 끓었다. 소비자는 광고를 보고 끊임없이 약국에서 박카스를 찾았다.

당시 동아제약은 박카스의 마케팅 전략을 3M(Mass Production, Mass Communication, Mass Sales)으로 짰다. '대량생산, 대량 대중광고 및 대량판매'다. 회사 재기의 방책을 이 전략에 뒀다.

그런데 이 3M 전략 중 '대량판매' 문제를 놓고 동아제약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간부회의에서 영업부서 간부들은 "지역별로 총판을 늘려 공급이 원활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 놨지만, 다른 젊은 간부들은 "총판대리점이나 도매상에게 맡기지 말고 독자적인 판매기반을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끝에 결국 동아제약은 대량광고로 소비자 지명도가 높아진 만큼, 직판조직만 갖춘다면 도매상들의 반발을 감당해 낼 수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박카스의 3M 전략이 희망대로 빛을 보려면, 도매유통업계의 물류 상황이나, 연%(연간 판매 또는 수금된 합계 금액의 일정액을 보상해 주는 비율) 및 외상거래 등과 같은 고착된 거래 관행을 고려할 때, 기존의 도매를 통한 유통 시스템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동아제약은 1965년 초 'DSC(DongA Sales Circle)'라는 도매유통업체를 거치지 않는 약국 직판조직을 제약업계 최초로 발족했다.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유통 채널(channel)'의 혁신이었다. 이 조직은 훗날 의약품 유통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약국에서 현금 받고 박카스를 파는 '루트 세일 조직'으로 발전됐다.   

그 당시, 도매협회(현 유통협회)의 강력한 반발에도 동아제약의 혁신적인 DSC 유통경로 전략은 대박을 터트렸다. 박카스 성공 덕택에 동아제약은 심각했던 부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1967년 제약업계 정상에 섰다. 그 최고의 자리는 그로부터 2013년, 옛 동아제약이 동아쏘시오홀딩스를 통해 신 동아제약과 동아에스티로 나누어지기 전까지 장장 45년 동안 지켜졌다.

이같은 내용들을 뒷 받침하는 역사 자료가 '도협50년사(142쪽~143쪽)'와 '도협30년사(99쪽~100쪽)' 및 '동아제약 70년사(191쪽)' 그리고 '신동아(2003.12월호)' 등에 남아있다. 이들 자료는 국내 의약품 유통사(流通史)에 획을 그을 수 있는 것들이다.

DSC 직판조직은, 결국 도매유통업계가 의약품 유통일원화 과제를 안고 1965년부터 2010년 종합병원 직거래 금지제도가 폐지되기까지, 길고 긴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단초가 됐다. 동아제약의 DSC 조직 성공 이후, 타 제약사들도 앞 다퉈 직거래 조직을 설치·가동함으로써, 1965년 이전 도매를 통한 의약품 유통일원화 비중이 100%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어 급기야 1993년 경 25%까지 하락하였기 때문이다. 

자료에 의거 다시 정리해 보면, 'DSC'란 약국 직거래를 뼈대로 하는 특약점 제도였다. 그 당시 의약품 유통시장은 제약사보다는 도매유통사에 의해 의약품시장의 상권이 좌지우지 됐을 정도로 도매업체들의 파워가 막강했다. 이들의 요구대로 가격을 맞추다 보니 동아제약의 마진율이 너무 낮았다. 게다가 약국들은 박카스가 제 때에 배송되지 않는다고 심한 불만을 토로하기 일쑤였다.

DSC는 동아제약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일선 약국과 직접 특약점 계약을 맺는 제도였다. 특약된 약국으로부터 일정액의 계약금을 받으면 월 4부의 이자를 동아제약이 약국에 지급하면서 각종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약국으로서는 동아제약의 전제품을 구색 맞춰 갖출 수 있었고, 또 각종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어서 유리했다. 동아제약 입장에서는 거래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도매유통업계는 이러한 55년 전 DSC 조직 발단에 대해, 왜 그렇게 됐는지 깊이 성찰했으면 한다. DSC의 바탕이 된 논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도매유통업계는 유념했으면 한다. 도매유통업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처지에 따른 주장만 일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제약사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해야 제약사들이 도매유통 채널을 바꾸지 않을까'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연구해 대책을 늦지 않게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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